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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439
한자 金啓煥
이칭/별칭 오은(嗚隱)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홍제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29년연표보기 - 김계환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83년 - 김계환 증광 생원시 입격
몰년 시기/일시 1793년연표보기 - 김계환 사망
추모 시기/일시 1892년 - 김계환 정려
출생지 성연마을 -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 성연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새재마을 -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 성연리
사당|배향지 새재마을 -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 성연리
성격 효자
성별
본관 광산

[정의]

조선 후기 충청남도 보령 지역 출신의 효자.

[개설]

김계환(金啓煥)[1729~1793]은 어려운 살림에도 행실이 바르고 효심이 깊었다. 김계환은 증조할아버지의 제삿날에 찬거리를 공양하기 위해 눈 속에서 게를 찾았고, 병을 앓던 아버지가 꿩 요리를 찾자, 삼복의 더위에도 꿩을 구하여 아버지에게 주니 다른 약이 필요 없었다. 이와 같은 김계환의 지극한 효성을 기리기 위해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가계]

본관은 광산(光山), 호는 오은(嗚隱)이다. 김계환의 8대조는 우의정을 지낸 김극성(金克成)[1474~1540]이다.

[활동 사항]

김계환은 어려서부터 수재(秀才) 소리를 들을 정도로 공부에 밝고, 도리를 알았다. 당시 복촌의 충정공 김극성의 종갓집은 충정공의 혈손(血孫)이 아닌 양자가 뒤를 이었는데, 김계환에 대한 소문을 들은 집안 어른들이 파양(罷養)하고 김계환을 들이려 하였다. 이에 김계환은 “충정공의 종손이 되면 많은 재산이 생길 것이나 어찌 남의 부를 탐내어 원래의 후계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겠는가.” 하며 마다하였다. 혼인한 후에는 처가에 후사(後嗣)가 없어 김계환에게 재산을 모두 돌리려 하였으나, 김계환은 “내가 어찌 남의 재산을 탐내어서 그 후사를 끊겠는가” 하며 다른 방법으로 후사를 잇기를 권고하였다.

김계환은 타고난 성실함으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17세 되던 해에는 오서산 천정사(天井寺)에 들어가 사마천의 『사기(史記)』와 『중용(中庸)』 천여 편을 독파하였다. 1783년에 증광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또한 8대조 김극성의 문집인 『우정집(憂亭集)』을 발굴 보존하여 후세에 전하였다.

무엇보다 김계환은 효자로 이름이 높았다. 김계환의 증조할아버지 기일(忌日)은 추운 정월달이었는데, 가세가 기울고 날씨마저 추워 제수를 마련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김계환은 제수를 장만하지 못하여 슬피 우는 아버지를 위해 찬거리를 찾아 눈 속 여기저기 헤매었다. 그때 커다란 게 두 마리가 홀연히 눈 위로 나타나니, 김계환은 그 게를 가져다가 제사에 공양하였다. 김계환이 40여 세에 이르렀을 때 병이 깊은 아버지가 꿩 요리를 먹고 싶다 하였다. 삼복 더위에 꿩을 구할 길이 없어 심히 근심 중이었는데, 집에서 기르던 개가 달려나가 우연히도 꿩을 물고 왔다. 그 꿩으로 요리를 해 아버지에게 주니 다른 약이 필요 없었다. 이러한 효행을 높이 사서 1892년 정려가 내려졌다.

[학문과 저술]

금강산을 유람할 때 성리학의 대가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1653~1722]을 만나 대화하고 돌아와 지은 여행기 『금강록(金剛錄)』이 있다.

[상훈과 추모]

효행으로 정려가 내려졌다. 정려는 김계환이 살았던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 성연리 새재마을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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