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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520
한자 李成龍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홍제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00년연표보기 - 이성룡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16년 - 이성룡 명과 후금의 전투 패배로 조선으로 피신
활동 시기/일시 1616년 - 이성룡 보령시 청소면에 정착
몰년 시기/일시 1653년연표보기 - 이성룡 사망
거주|이주지 거주지 -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 지도보기
묘소 이성룡 묘소 -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 야현리 지도보기
성격 무인|귀화인
성별
본관 농서

[정의]

조선 후기 명나라에서 귀화하여 충청남도 보령 지역에 정착한 무인.

[개설]

이성룡(李成龍)[1600~1653]은 조선 후기 명에서 귀화한 무인으로 명과 후금의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명군이 패하자 조선으로 피신하여 보령에서 혼인하고 정착하였다. 이성룡의 후손들이 보령에 세거하고 있다.

[가계]

본관은 농서(隴西)이다. 할아버지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구원군 장수였던 이여매(李如梅)이며, 종조할아버지는 이여송(李如松)[1549~1598]이다. 아버지는 이헌충(李憲忠)이다. 진주 강씨 강수남(姜壽男)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이번득(李翻得)을 두었다.

[활동 사항]

이성룡의 본관 농서 이씨는 중국 성씨이다. 이성룡의 선조는 임진왜란 중 명나라 구원군으로 조선에 왔던 이여매이고, 이성룡은 이여매의 손자이다. 이성룡은 명과 후금의 요하 전투, 즉 1616년 ‘심하지역(深河之役)’에 아버지 이헌충과 함께 출전하였다가 명군이 패하자 조선에 의탁하였다. 『영조실록(英祖實錄)』에 기록된 1738년(영조 14) 강화유수 권적(權𥛚)의 상소에 임진왜란 때의 명나라 장수들 중 이여매의 손자 이성룡이 조선에 표류해 와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 장만(張晩)[1566~1629]의 막부(幕府)에 몸을 의탁하였는데, 그 뒤 쇄환(刷還)하는 일이 있었으나, 장만이 또 숨을 것을 건의하여 호서(湖西)에서 살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호서는 충청도로, 현재 보령시 청소면이성룡의 묘가 있는 것을 보면 이 일대에 거주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성룡은 남포[보령] 지역 진주 강씨 강수남(姜壽男)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다.

1705년(숙종 31)에 판윤 민진후(閔鎭厚)[1659~1720]가 이성룡의 종손을 돌보고, 그 후손들 중 한 사람을 등용해 주기를 청하여 숙종(肅宗)[재위: 1674~1720]이 기쁘게 허락하였다. 그런데 다시 영조(英祖)[재위: 1724~1776] 때의 기록을 보면, 증손자 이면(李葂)이 종손(宗孫)인데 빈천한 형편이라 강화도에서 유리(流離)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어, 이 집안의 종손은 충청도를 떠나 다른 지역에 거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1876년(고종 13) 8월 29일 기사에, 평양에 세워진 무열사(武烈祠)에 명나라 장수들의 위판을 모시고 제향을 올렸는데, 이와 관련하여 참봉 2인을 임용하였고, 그중 한 자리를 농서 이씨가 대대로 이어받고 있다는 내용이 있다. 이를 보면, 평양 지역에도 농서 이씨가 세거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충청남도 보령에 농서 이씨가 정착하여 그 후손들이 400여 년간 보령에 세거하고 있으며, 일부는 강화도로 옮겨 정착하였다.

[묘소]

이성룡의 묘소는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 야현리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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