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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536
한자 高灣梁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주교면 송학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문광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할 지역 고만량 - 충청남도 보령시 주교면 송학리 지도보기

[정의]

충청남도 보령시 주교면에 있는 해협.

[개설]

고만량(高灣梁)충청남도 보령시 주교면에 있는 해협으로 전라도의 세곡(稅穀)을 실은 조운선(漕運船)이 서울로 가기 위해 지나는 해로(海路)이다. 조선 초기부터 왜구의 약탈이 잦았다.

[내용]

고만량(高灣梁)은 전라도의 세곡을 실은 조운선이 지나는 해협으로 왜구의 약탈이 잦은 곳이었다. 조선 전기 고만량을 지키기 위해 보령현 서쪽 송도포(松島浦)에 만호(萬戶)[조선 왕조의 종4품 무관 관직으로 지방 군영[진영]의 장수, 즉 진(鎭)의 영장(營將)]가 파견되었다. 고만량 만호는 병선(兵船)을 10척, 선군을 661명 거느렸다. 조선 초기 고만량은 왜적의 침입이 잦았는데, 고만량 만호가 죽거나 병선을 빼앗겼다.

[변천]

고만량은 수로가 험난하고 암초가 있는 곳이었다. 태안의 안흥량(安興梁)처럼 수로가 험난한 해협에는 이름 뒤에 량(梁) 자가 붙었다. 고만량에서 조운선이 패몰(敗沒)하는 일이 생겨 1413년(태종 13) 안흥량으로 조운로를 바꾸자는 논의도 있었다. 조운선이 고만량으로 항행하면서 이를 노린 왜구의 침입이 조선 초기부터 잦았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면 1393년(태조 2) 고만량 만호(萬戶) 신용무(申用茂)는 왜구를 방어하지 못하고 병선 3척을 빼았겼으며, 만호 최용유(崔用濡)는 왜구에게 패해 아들 둘과 함께 전사하고 배 5척을 빼았겼다. 1401년(태종 1)에는 천호(千戶)[조선초 진관 체제(鎭管體制) 정비 이전에 지방군을 관할하던 하급 무관직] 서안례(徐安禮)가 병선 1척을 빼앗기고 도망쳤다. 1419년(세종 1) 왜구를 효과적으로 방어하지 못한 죄로 고만량 만호 황언(黃彦), 고만량(高巒梁) 해령만호(海領萬戶) 안권(安權) 등에 대한 처벌이 조정에서 논의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 전기 전라도의 조운선이 지나던 해로로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만호가 파견된 군사 거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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