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472
한자 李夢奎
이칭/별칭 천휴당(天休堂)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홍제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10년연표보기 - 이몽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40년 - 이몽규 생원시 입격
몰년 시기/일시 1563년연표보기 - 이몽규 사망
추모 시기/일시 1721년 - 이몽규 화암서원에 배향
추모 시기/일시 1874년 - 이몽규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 추증
거주|이주지 낙향지 -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지도보기
묘소|단소 이몽규 묘소 - 충청남도 보령시 죽정동 독정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화암서원 -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죽성로 411[장산리 산27-1]지도보기
성격 문인
성별
본관 경주
대표 관직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

[정의]

충청남도 보령 지역에 은거한 조선 전기의 문인.

[개설]

이몽규(李夢奎)[1510~1563]는 조선 전기의 선비로 일찍부터 학문이 높은 경지에 도달하였으나 벼슬에 뜻이 없고 전원생활을 동경하여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에 은거하였다.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천휴당(天休堂)이다. 우의정 김극성(金克成)[1474~1540]의 사위이다. 슬하에 1남 1녀가 있는데, 사위 조남(趙擥)은 양주 조씨 보령 입향조이며, 아들은 조존성이다.

[활동 사항]

이몽규경주 이씨광성부원군 김극성의 사위이며 한산 이씨의 외손이다. 1510년 서울 백악산 아래 장의동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0세에 대의(大義)에 통하고 13세에 눌재(訥齋) 박상(朴祥)의 문하로 들어갔는데, 박상은 이몽규를 일컬어 훗날 국기(國器)가 될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1540년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당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는 이몽규의 거주지가 서울로 표기되어 있다.

1545년에 일어난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되어 1547년(명종 2)부터 처가의 별장이 있는 보령에서 종신토록 은거하였다. 장인 김극성이 벼슬을 권했으나 거절하였다. 평소 부귀와 영달에 뜻이 없어 보령의 집 후원에 서실(書室)을 마련하고 ‘천휴당’ 이라 하였다. 이몽규의 명성이 널리 알려져 보령의 사족들이 덩달아 학문과 덕행을 깨우쳤다.

1563년 54세에 사망하였다. 이몽규의 사망 소식에 고을 사람들이 몰려와 장례를 도왔고, 상복을 입은 사람이 부지기수(不知其數)였고, 부녀자들까지도 슬퍼하였다고 한다. 고을 사람들이 한 달 넘게 육식과 가무를 삼가하였다고 한다.

『율곡선생전서(栗谷先生全書)』 권18에 「천휴당 이공 행장(天休堂 李公 行狀)」이 수록되어 있고, 잠곡(潛谷) 김육(金堉)[1580~1658]의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유학(儒學)조에 「천휴당 이공전(天休堂李公傳)」이 실려 있다.

[묘소]

이몽규의 묘소는 충청남도 보령시 죽정동 독정에 있다.

[상훈과 추모]

1721년(경종 원년) 경주 이씨인 이세현(李世炫)의 소청으로 이몽규화암서원(花巖書院)에 추향하였고, 1874년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嘉善大夫 司憲府 大司憲)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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