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502
한자 鄭弘淳
이칭/별칭 의중(毅仲),호동(瓠東),정민(靖敏),충헌(忠憲)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홍제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20년연표보기 - 정홍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45년 - 정홍순 정시문과 병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762년 - 정홍순 장헌세자 장의 주관
활동 시기/일시 1777년 - 정홍순 우의정 제수
몰년 시기/일시 1784년연표보기 - 정홍순 사망
추모 시기/일시 1784년 - 정홍순 시호 정민(靖敏) 추증
묘소|단소 정홍순 묘소 - 충청남도 보령시 천북면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동래
대표 관직 우의정

[정의]

충청남도 보령 지역 출신의 조선 후기 문신.

[개설]

정홍순(鄭弘淳)[1720~1784]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장헌세자(莊獻世子)[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상(喪)에 장의(葬儀)를 주관하며 바른 일처리로 정조(正祖)[재위: 1776~1800]의 눈에 들어 관직이 우의정에 이르렀다. 호조판서(戶曹判書)로 재직 중 재정 문제에 재능을 발휘하였고, 준엄하고 강직한 성격과 일처리에 대한 일화가 여럿 전한다.

[가계]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의중(毅仲), 호는 호동(瓠東)이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1602~1673]의 후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정재대(鄭載岱), 할아버지는 정혁선(鄭赫先)이다. 아버지는 참판 정석삼(鄭錫三), 어머니는 임성군(臨城君) 이엽(李熀)의 딸이다. 부인은 여산 송씨 송창명(宋昌明)의 딸이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동래 정씨 가문이 충청남도 보령과 인연을 맺게 되는 것은 선조(宣祖)[재위: 1567~1608] 대의 문신 문익공파 18세 정준연(鄭俊衍)[1568~1609]이 보령의 한산 이씨 이산보(李山甫)[1539~1594]의 딸과 혼인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정홍순의 가계와는 가깝게 연결되는 것은 아니어서, 정홍순이 보령에 묘를 조성하는 데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 알기 어렵다. 정홍순은 1740년에 진사에 입격하고, 1745년(영조 21)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사마방목(司馬榜目)과 문과방목(文科榜目)에는 거주지가 모두 한성으로 표기되어 있다. 문과 급제 후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설서·이조정랑·지평·교리·이조참판 등을 거쳐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가 되었다. 1762년 호조판서(戶曹判書)로서 예조판서(禮曹判書)를 겸해 장헌세자의 상에 장의를 주관하였다. 정홍순은 장헌세자의 의복과 금침에서부터 악모대리(幄帽帶履) 등 미세한 것까지 한 쪽씩 떼내어 그때의 문부(文簿)와 함께 봉하여 수자(守者)를 단속하고 이를 보관하였다. 1765년 호조판서로 10년간 재직하면서 재정 문제에 특히 재능을 발휘하여 당대 제일의 재정관으로 명성을 날렸다.

1777년 정조가 즉위한 다음 해, 앞서 장헌세자의 장례 때 상례의 풍부 여부를 알고자 당시 예조판서였던 정홍순을 대령하게 하였다. 정홍순이 곧 서리를 시켜 당시 간직해 두었던 것을 내어다 보이자, 정조는 부장품이 풍부하고 예에 빠진 것이 없음을 보고 매우 가상히 여겨 곧 우의정에 제수하였다. 정승이 된 뒤에도 검소한 생활을 하였는데, 어느 때인가 집을 수리하다 공인(工人)과 일삯을 두고 서로 다툰 일이 있었다. 이를 본 정홍순의 아들이 “어른의 신분으로 천한 공인과 노임을 가지고 다투는 것은 체면에 관계되는 일이 아닙니까?” 하니, 정홍순은 “정승은 한 나라의 의표(儀表)인데, 내가 삯을 과히 주면 온 나라의 예가 되어 빈한한 백성들이 많은 곤란을 받게 된다”라고 하였다.

정홍순에게 깨진 동전 한 푼이 있었는데, 사람을 시켜 땜질하여 붙이는 데 두 푼이 들었다. 어떤 사람이, “두 푼을 들여 한 푼을 얻으면 오히려 한 푼이 손해가 나는데 어째서 공은 그런 일을 합니까?”라고 묻자, 정홍순은 “나 개인은 한 푼을 잃었어도 나라에는 한 푼이 이익이 되니 어찌 이익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여 사람들이 모두 정홍순의 도량에 탄복하였다.

정홍순의 묘는 충청남도 보령에 조성되었다. 그러나 정홍순의 아버지, 할아버지를 비롯해 아들, 손자도 모두 보령이 아닌 경기도에 묘역을 조성하여, 오직 정홍순의 묘만 보령에 있다. 그 배경을 알기 어려우나, 동래 정씨가 이산보의 집안과 관련이 있었으므로 당대에 묫자리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그 점이 고려되었을 것이다.

[묘소]

묘소가 충청남도 보령시 천북면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가 정민(靖敏)으로 내려졌다가, 뒤에 충헌(忠憲)으로 개시(改諡)되었다.

[참고문헌]
  • 『보령시지』(보령시지편찬위원회, 2010)
  • 두산백과 두피디아(https://www.doopedia.co.kr)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s://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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