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504
한자 趙秉悳
이칭/별칭 유문(孺文),숙재(肅齋),문경(文敬)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홍제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00년연표보기 - 조병덕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13년 - 조병덕 남포현 삼계리 외가로 돌아옴.
활동 시기/일시 1828년 - 조병덕 서울에서 남포면 삼계리로 이사
활동 시기/일시 1852년 - 조병덕 경연관 임명
활동 시기/일시 1853년 - 조병덕 사헌부장령 임명
활동 시기/일시 1858년 - 조병덕 이조참의, 사헌부집의 임명
몰년 시기/일시 1870년연표보기 - 조병덕 사망
추모 시기/일시 1875년 - 조병덕 시호 문경(文敬) 추증
출생지 서울 황화방 취현동[현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거주|이주지 입향지 -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삼계리 지도보기
부임|활동지 활동지 -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삼계리
묘소|단소 조병덕 묘소 -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삼계리
사당|배향지 신도비 -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삼계리
성격 문인
성별
본관 양주
대표 관직 호조참판

[정의]

조선 후기 충청남도 보령에 은거하며 유교 문풍을 진작하고 후학 양성에 전념한 문인.

[개설]

조병덕(趙秉悳)[1800~1870]은 조선 후기의 문인으로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이 있었음에도 모두 사양하고, 충청도 남포[현 보령시 미산면]에 입향하여 지역 사림들의 공론을 주도하는 산림(山林)[학식과 덕이 높으나 벼슬을 하지 아니하고 숨어 지내는 선비]의 역할에 충실하였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가계]

본관은 양주(楊州), 유문(孺文), 호는 숙재(肅齋)이다. 할아버지는 조진대(趙鎭大),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조최순(趙最淳), 어머니는 은진 송씨 송후연(宋厚淵)의 딸이다. 부인은 광산 김씨 김재선(金在宣)의 딸로, 아들 둘을 두었다.

[활동 사항]

조병덕은 조선 후기의 문인으로 서울 황화방(皇華坊) 취현동(聚賢洞)[현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외가에서 지내며 외할아버지 송후연(宋厚淵)에게서 『소학(小學)』을 배우고, 14세 때인 1809년에 남포현(藍浦縣) 삼계리(三溪里)[현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삼계리]로 돌아왔다. 혼인 후 1828년(순조 28)에 서울에서 남포 삼계리로 이사하여 지역에서 강학하며 유교 문풍 진작에 힘썼다.

1852년(철종 3) 음보(蔭補)[조상의 덕으로 벼슬을 얻음. 또는 그 벼슬]로 지평(持平)이 되고, 경연관이 되었다. 이어 이조참의(吏曹參議)를 거쳐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모두 거절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조병덕은 동문의 임헌회(任憲晦)[1811~1876] 등과 병칭(竝稱)되던 한말의 거유였으며, 성리학자로도 이름이 높았다. 지역에서 사림들의 공론을 주도하는 산림으로 활약하였는데, 오늘날까지도 삼계리의 촌로들은 조병덕을 ‘조산림’으로 부른다.

평생 학문에 전념하며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조병덕은 자손들에게 명정(銘旌)과 신주에 ‘징사숙재(徵士肅齋)’로 쓰라고 유언을 남겼는데, 이는 ‘벼슬을 주며 불러도 나가지 않는 선비 숙재 선생’이라는 뜻이다. 조병덕은 지역의 후학 양성에도 힘써 조병덕이 사망한 후 상복을 입고 상여를 뒤따른 제자들이 50여 명에 이르렀다 한다. 『고종실록(高宗實錄)』의 졸기(卒記)에 의하면, 고종이 전교(傳敎)하기를, 조병덕은 산림에서 덕을 쌓은 사람으로 경연 자리에 참가하게 하려고 애썼지만 안타깝게 부고를 받게 되었다며, 조문하고 해조로 하여금 규례대로 거행하게 하고 상여를 메는 군사를 충청도에서 제급하게 하라는 명을 내렸다.

조병덕의 아들 조충희(趙忠熙)[1848~?]는 남포(藍浦)의 사근천(思勤川) 가에 살면서 그 집에 편액하기를 ‘수오(遂吾)’라고 하였는데, 아산에 살던 한장석(韓章錫)[1832~1894]에게 보낸 편지에 “이는 우리 선친께서 명하신 것이다. 자네가 나를 위해 기록해 주어 앞으로 그것을 가지고 스스로 힘쓰게 도와 주게.” 라고 한 바 있다.

조병덕은 이재(李縡)·김원행(金元行)으로 이어지는 학맥을 홍직필에게서 이어받아 문하의 김병창(金炳昌) 등에게 전수한 중심 인물이었다. 조병덕이 아들에게 보낸 서간 1,700여 통이 발굴되었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숙재집(肅齋集)』이 있다.

[묘소]

묘와 신도비가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삼계리에 조성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875년 문경(文敬)의 시호를 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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