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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144
한자 白山面
영어공식명칭 Baeksan-myeon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용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연표보기 -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개설
성격 법정면
면적 36.50㎢
가구수 1,576가구
인구[남/여] 2,585명[남 1,276명/여 1,309명]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에 속하는 법정면.

[개설]

부안군의 동부에 있는 면이다. 백산면 사무소는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백산로 335[덕신리 155-3번지]에 있다.

[명칭 유래]

백산면(白山面)의 지명은 백산(白山)[47.4m]에서 왔다. ‘백(白)’은 ‘밝다’에서 온 말이고 ‘밝다’는 해가 뜨는 동쪽을 의미하는데, 이는 백산이 부안에서는 동편에 있는 산이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은 백제가 멸망할 때 마지막 싸움으로 기록된 ‘백강 전투’의 백강(白江)을 동진강으로 보기도 한다.

[형성 및 변천]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고부군 거마면(巨麻面)의 송월리, 석교리, 월평리, 남평리, 대수리, 소수리, 월상리, 수성리, 거룡리, 산전리, 하청리, 괴정리, 사거리, 봉동리, 오곡리, 계동리, 반월리, 대산리, 임방리, 초장리, 덕신리, 평교리, 월천리, 토등리, 망산리, 토치리, 외거리, 제내리, 죽림리, 금추리, 응봉리, 신기리, 광북리, 신평리, 광상리, 국성리, 대죽리, 쌍교리의 38개 동리와 고부군 덕림면(德林面)의 죽림리, 신야리, 신광리, 구공리, 대흥리, 하구리, 구야리, 석천리, 신포리의 9개 동리, 고부군 궁동면(宮洞面)의 석지리, 월산리, 청량리, 장재리의 각 일부, 고부군 북부면(北部面)의 앵성리 일부, 부안군 상동면(上東面)의 북정리, 부안군 하동면(下東面)의 석하리, 부안군 소산면(所山面)의 사정리, 공장리의 각 일부, 김제군(金堤郡) 홍산면(洪山面)의 흑관리, 상포리와 김제군 부량면(扶梁面)의 신정리, 구정리, 사정리의 각 일부, 태인군(泰仁郡) 용산면(龍山面)의 정길리, 고잔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용계리(龍溪里), 원천리(元川里), 금판리(金坂里), 덕신리(德新里), 오곡리(梧谷里), 평교리(平橋里), 거룡리(巨龍里), 대수리(大水里), 하청리(河淸里), 대죽리(大竹里), 신평리(新平里), 죽림리(竹林里)의 12개 법정리로 개편하고 부안군 백산면으로 하였다.

1927년 11월 15일자 『동아일보』에는 11월 11일 거행된 ‘백산교(白山橋) 낙성식’이 소개되어 있다. 당시 부안군의 숙원 사업 중 하나인 백산교의 완성은 부안군 지역이 주변 지역과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게 하는 큰 사건이었다. 동진강백산면의 시기마을[장터]과 지금의 백룡초등학교 뒤로 굽이굽이 흘러 원천리를 통하는 물길이었다. 물길이 깊고 밀물 때면 바닷물이 이곳까지 밀고 들어와서 바닷물과 강물을 막으면서 다리 공사를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공사를 언제부터 시작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27년 완성되었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그즈음 완성된 부안군청에 들어간 총 공사비는 1만 2000여 원, 백산교의 총 공사비는 2만 8000여 원이었다. 백산교부안군청 공사비보다 두 배나 더 들어갈 만큼 대규모 공사였는데, 당시 전라북도에서는 드물게 큰 다리로 평가되었다. 1978년 동진 대교가 완성되어 찻길이 바뀌기까지 거의 50년간 부안에서 출발한 차들은 백산교를 건너야 신태인·김제·군산·전주 등 대처(大處)로 갈 수 있었다.

동진강이 자주 범람하여 그때마다 홍수 피해가 컸으므로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일제 강점기 말부터 물길을 반듯하게 만드는 직강(直江) 공사가 시작되었지만 광복이 되면서 중단되었다. 직강 공사는 곡류하는 하천의 유로를 직선화함으로써 물의 흐름을 빠르게 하여 홍수 피해를 줄이고 농경지를 이용하기 위해서 시행되었다. 기존의 동진강 물은 백산면 시기마을 뒤와 백산 다리 밑을 지나 원천리로 흘러갔다. 직강 공사를 위해서는 물길이 김제군 부량면 옥정리 앞을 지나도록 아예 옮겨야 했다. 광복 이후 공사가 다시 시작되었고, 새로운 곳에 터 파기를 하여 강줄기를 바꾸다 보니 새로운 다리가 필요하였다. 이때 만든 다리가 군포교로 1958년 10월에 완공되었다. 군포교는 ‘큰다리’ 혹은 ‘군개 다리’라고도 불렀다.

일제 강점기에는 웅본 농장(熊本農場), 척식 농장(拓植農場), 다목 농장(多木農場), 송장밀 농장(松場密農場) 등이 다투어 들어와 백산면을 거점으로 관리소와 도정 공장 등을 설치하여 수탈, 착취하였다. 송장밀삼랑(松場密三郞)은 별칭으로 약산(若山)이라 불렀는데, 큰 도정 공장에 건조장까지 지어 놓고 밤낮으로 매를 갈아[도정을 하여] 만든 미곡들을 동진강을 거슬러 군산을 경유, 일본으로 가져갔다. 이 무렵 도정 공장을 ‘매갈이간[매갈잇간]’이라고 하였는데, 우리 전래의 미곡 도정은 맷돌이나 통매를 돌려 도정을 하였기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광복 후에는 ‘방앗간’ 또는 ‘정미소’라고 하였다. 당시 번화하였던 백산면의 중심지가 부안과 신태인, 고부 방면으로 갈라지는 백산 삼거리였다. 이곳을 중심으로 상가가 들어서고 장터가 형성되었으며 광복 후에는 백룡초등학교백산중학교, 백산고등학교가 들어섰다. 그러다가 1978년 동진 나루에 동진 대교가 축조되면서 교통의 흐름이 그쪽으로 쏠리게 되어 백산 삼거리는 한산한 시골 거리가 되어 버렸다.

[자연환경]

부안군의 동부 평야 지대에 자리하여 동쪽은 김제시 부량면과 정읍시 신태인읍, 남쪽은 정읍시의 이평면·영원면, 서쪽은 부안군의 주산면·부안읍, 북쪽은 부안군 동진면, 김제시 죽산면과 접한다. 앞과 뒤로 동진강고부천이 흘러 황해로 빠진다. 농사짓기에 알맞은 평야 지역으로 서북과 동북은 고부천동진강 유역의 비옥한 평야 지역이고, 동남부는 약간의 야산과 구릉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황]

백산면의 관할 행정 구역은 12개 법정리, 53개 행정리, 106반이다. 백산면의 법정리는 덕신리, 금판리, 용계리, 원천리, 대수리, 하청리, 거룡리, 대죽리, 평교리, 오곡리, 죽림리, 신평리이다. 면적은 36.50㎢이며, 이 중 밭이 2.50㎢, 논 22.55㎢, 임야 1.55㎢ 등이다. 2020년 12월 31일 현재 총 1,576가구, 2,585명[남 1,276명/여 1,309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백산은 47.4m의 나지막한 산이지만 호남평야 한가운데 홀로 솟아 있어 이곳에 오르면 김제시, 정읍시, 고창군, 부안군 등 4개 시군이 한눈에 들어온다. 백산 앞과 뒤로 동진강고부천이 기름진 호남평야를 적시며 황해로 흘러가는데, 예전에는 조수가 동진강을 거슬러 신태인까지, 그리고 고부천을 거슬러 눌제 아래까지 닿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백산 하면 떠오르는 것이 동학 농민 혁명이다. 1894년(고종 31) 3월 26일 각지에서 백산으로 모여든 동학 농민 혁명군이 ‘호남 창의 대장소’의 이름으로 격문과 함께 혁명군의 행동 강령을 발표하였다. 이 백산 대회에서 동학 농민 혁명군이 편재되었는데, 지도부를 구성하고 지휘 체제를 정비하여 본격적인 동학 농민 혁명의 시작을 알렸다. 『홍재일기(鴻齋日記)』에는 동학도 4,000여 명이 백산에 모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최근 부안군 농촌 중심지 활성화 사업의 일환으로 녹두꽃 문화 복지 센터가 2019년 12월 준공되었다. 녹두꽃 문화 복지 센터는 398.62㎡ 규모의 공동 급식소와 프로그램실 등이 있으며, 8,040㎡의 체련 시설 등 주민들의 건강을 위한 시설과 문화 복지 프로그램이 가능한 시설이 다양하게 들어섰다. 백산면 농촌 중심지 활성화 사업은 총 사업비 57억 원을 투자하여 녹두꽃 문화 복지 센터와 함께 백산 체련 공원, 동학 테마길, 보행로 정비 등 2016년부터 복지 인프라 확충 및 지역 경관 개선을 목표로 추진하고 있다. 교육 기관으로 백룡초등학교백산초등학교, 백산중학교, 백산고등학교가 있다.

문화재로는 백산면 용계리 백산에 삼국 시대 토성인 부안 백산성[사적 제409호]이 있고, 백산면 죽림리죽림리 석장승[전라북도 민속 문화재 제20호]이 있다.

백산면 오곡리에는 김철수(金綴洙)[1893~1986]의 생가가 있다. 김철수는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 계열 독립 운동가로, 조선 공산당 3차 집행부 책임 비서로 활동하였으며 호는 지운(芝雲)[혹은 지운(遲耘)]이다. 1947년 극심한 좌우익의 세력 다툼에 환멸을 느끼고 백산면으로 낙향하였고, 1968년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파하고 통일을 염원하며 작은 고통이라도 나눈다’는 자세로 토담집인 ‘이 정도면 편안하다’는 뜻의 이안실(易安室)을 짓고 칩거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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