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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1138
한자 通井里星岩-堂山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유적/민간 신앙 유적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통정리 성암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상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현 소재지 통정리 성암 짐대 당산 -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통정리 성암마을지도보기
성격 민간 신앙 유적|당산
크기(높이,둘레) 높이 260㎝|넓이 34~36㎝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통정리 성암마을에 있는 돌로 만든 오리 조각을 돌기둥 위에 얹어 놓은 마을 공동체 신앙물.

[개설]

통정리 성암 짐대 당산성암마을에서 돌로 만든 오리 조각을 돌기둥 위에 얹어 놓은 짐대로, 마을을 수호하는 기능을 하는 민간 신앙 유적이다.

짐대는 가늘고 긴 나무나 돌 윗부분에 새를 한두 마리 올려놓고 단독으로 세우거나, 장승과 함께 마을 입구나 신성한 장소에 세워 액운을 방지하고 마을을 수호하는 신으로 솟대의 일종이다. 짐대는 진대·거오기·수살막이대·까마귀·철통·솟대·솔대·별신대·영동대·화줏대·거릿대·오릿대·볏가릿대 등의 명칭으로도 전해진다. 풍수지리설에 바탕을 둔 신앙물 중 하나인 짐대는 일반적으로 마을 액막이[마을 수호·화재 예방·풍농·풍요·기자 등을 위해서 세우는 짐대]의 목적을 위해 세워지거나, 마을의 행주형 지세를 보완하기 위하여 세워지거나, 급제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우기도 한다.

[위치]

부안군 상서면 통정리성암마을 짐대 당산은 마을의 북쪽 장다리 큰 다리 방면으로 통하는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었다. 짐대 당산이 서 있는 곳은 원래부터 큰 소나무 당산이 있던 곳으로 마을 뒤편에 해당한다. 현재는 경지를 정리하면서 없어졌다.

[형태]

통정리 성암 짐대 당산은 사각 석주로 조성되었다. 돌 짐대의 크기는 높이가 260㎝이고, 둘레는 4각으로 되어 있는데, 석간(石竿)의 한 면이 34~36㎝ 정도로 비교적 굵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의례]

통정리 성암마을의 당산은 아름드리 큰 소나무 한 그루로 된 당산 할머니였다. 매우 영험하여 함부로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1970년대 말 무렵에 경지를 정리하면서 수로를 내게 되었는데, 이후에 고사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당산제도 끊겨 몇 해 동안 당산제를 모시지 않았다. 이후, 마을에 불행한 일이 자주 발생하고 젊은 사람들이 죽는 사고가 있었다. 이에 주민들은 그 원인이 당산신의 노여움을 타서 그런 것으로 생각하여, 마을 회의에서 논의 후에 돌 짐대를 1980년대 조성하여 당산제를 다시 지내게 되었다.

성암마을의 당산 제일은 정월 대보름날 초저녁인데, 음력 이월 초하룻날 지내기도 했다. 그 이유는 옛날처럼 마을 사람들이 부정한 일을 막기 위한 여러 가지의 금기 사항을 잘 지켜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용은 걸립으로 집집마다 성의껏 추렴하며, 주로 아주머니들이 주선하여 마련하고 있다. 제물을 장만하는 화주와 제관의 선정은 깨끗한 사람으로 마을 회의에서 결정하는데, 주로 아주머니에 의하여 당산제가 이루어졌다. 당제 날은 풍물을 치며 집집마다 짚을 추렴하여 여섯 가닥으로 줄을 꼬아 한 줄로 합하여 30m 정도의 길이에 직경 30㎝ 굵기의 동아줄을 마련했다. 저녁을 먹은 후 풍물굿 패를 선두로 주민들은 줄을 메고 마을 돌기를 한 후 남녀 두 패로 나누어 줄다리기를 하는데, 삼판양승으로 승부를 겨룬다. 여자 편이 이겨야 그해 풍년이 든다고 하여 대개 여자 쪽이 이기게 되어 있다. ‘줄다리기’가 끝나면, ‘당산 할머니 옷 입히기’를 한다. ‘옷 입히기’가 끝나면 할머니 당산 앞에 제상을 차리고 당산제를 모시게 된다. 제물은 돼지머리를 비롯하여 밥·떡·삼실과·포·나물·술 등이며, 쌀을 담은 그릇에 초를 꽂아 촛불을 밝히고, 분향-재배-헌작-소지-축원 등의 순으로 모셨다.

[현황]

현재 통정리 성암 짐대 당산은 없어졌다. 돌 짐대를 세운 곳에서 흔적이라도 찾으려 했으나 전혀 그 자취를 볼 수가 없다.

[의의와 평가]

통정리 성암마을의 돌 짐대는 본래 당산이 없어진 이후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하여 조성된 신체이다. 성암마을 이웃에 있는 하서면 언독리 신지마을에서도 성암마을과 같이 당산이 고사하여 돌 장승을 새롭게 조성한 사례가 있다. 성암마을 돌 짐대는 경지 정리로 없어지기는 했으나, 당산나무가 고사하여 마을 사람들이 논의 후에 다시 신체가 조성되었고, 당산제가 부활한 사례 연구로 그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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