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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 년 대벌 당제 기록이 전하는 두 마리 새 돌짐대를 모시는 대벌 마을 이야기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1316
한자 百餘年大筏堂祭記錄-傳-大筏-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계화면 궁안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상훈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계화면 궁안리 대벌마을에는 우리나라에서 찾아보기 힘든 두 마리 새 돌짐대가 있다. 그리고 100년간의 당제 기록인 『대벌 당제』 민속지가 간직된 마을이다. 현재는 당산제가 중단된 상태이다. 대벌마을 당산제가 복원되면서 마을 공동체의 구심체 역할을 기대해 본다.

[개설]

궁안리 대벌마을에는 독특한 두 마리 새 돌짐대가 있다. 마을의 풍어와 풍년, 안녕을 기원하며 세워진 부안군의 대표적인 돌짐대 중 하나이다.

대벌마을은 과거 해안가여서 염전이 있었으나 지금은 간척 사업으로 농업에 종사하는 작은 농촌으로 변했다. 1749년에 세워진 돌짐대는 마을의 공동체적인 삶을 살던 대벌마을 사람들의 구심체 역할을 하였다. 또한 어촌 마을인 대벌마을 돌짐대는 독특한 형태로 제의가 변화되었다. 특히 당산의 기능, 축문, 제수용품, 시주자 명단과 금액 등 100년간 당제를 소상하게 기록한 『대벌 당제(大筏堂祭)』 민속지를 간직한 마을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 대벌 당제는 중단된 상황이다. 그런데 최근에 대벌마을 당산제를 복원하고자 하는 뜻을 마을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 대벌마을 당산제를 현대적 의미로 어떻게 복원해야 할 것인가는 마을 사람들의 고민이다. 오래전에 조상이 남긴 두 마리 새 돌짐대 제의를 복원하면서 마을 공동체도 함께 끈끈해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부안의 돌 문화, 짐대·장승 문화권]

부안의 돌 문화는 짐대와 장승으로 대표된다. 짐대는 가늘고 긴 나무나 돌 윗부분에 새를 한두 마리 올려놓고 단독으로 세우거나, 장승과 함께 마을 입구나 신성한 장소에 세워 액운을 방지하고, 마을을 수호하는 신으로 신앙화된 민속 신앙물이다. 짐대는 진대·거오기·수살막이대·까마귀·철통·솟대·솔대·별신대·영동대·화줏대·거릿대·오릿대·볏가릿대 등의 명칭으로도 전해진다. 짐대는 일반적으로 마을 액막이[마을 수호·화재 예방·풍농·풍요·기자 등을 위해서 세우는 짐대]의 목적을 위해 세워지거나, 마을의 행주형 지세를 보완하기 위하여 세워지거나, 급제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우기도 한다. 장승은 마을이나 사찰 입구에 나무나 돌로 세워 놓은 것이다. 상부에는 사람 얼굴이나 귀면(鬼面)의 형상을 그리거나 조각하고, 하부에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 등의 명문 또는 이정(里程)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민간에 의해 생성·전승된 민간 신앙물이다.

부안읍성을 중심으로 동문안, 서문안, 남문안 당산은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짐대와 장승이 결합한 마을 공동체 신앙물이 있다. 앞에서 언급된 이외에도 부안에는 많은 짐대와 장승이 있다. 부안읍 내요리 돌모산마을, 계화면 궁안리 대벌마을·원창북마을, 상서면 성암마을[현재는 없어짐]에서도 짐대를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장승은 하서면 언독리 신지마을, 백산면 죽림리 공작마을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보안면 우동리 우동마을, 위도면에서도 나무 짐대와 장승이 있었다. 이렇게 보면 부안 지역을 ‘짐대·장승 문화권’이라 설정하여도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부안의 돌 문화란 ‘부안 사람들이 주체가 되어 그들의 일정한 삶의 방식 안에서 만들어 온, 다른 지역과 비교해 독자성이 강한, 그리고 역사 속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고 전승해 온 문화’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부안 지역 짐대와 장승 문화가 아닌가 생각된다.

[벌막(筏幕), 염창(鹽倉)이 있었던 대벌 마을의 변화]

대벌마을은 소금을 생산했던 어촌 마을이었다. 그래서 ‘염소(鹽所)’라고 불렸다고 한다. 대벌마을은 본래 행안면에 속하였다. 그런데 계화도 간척 사업[1963~1977]이 이루어지면서 계화면이 새롭게 생기게 되었다. 이후 1983년 궁안리와 함께 계화면에 편입되었다. 궁안리에 갯벌이 있었는데, 개항기에 용동궁에서 둑을 쌓고 개간한 궁답의 안쪽에 위치하여 ‘궁안’이라고 불렸다. 대벌마을 일대에는 벌막이 여러 채 있었다. 벌막은 토염을 굽던 움막이다. 갯벌에서 농도 짙은 염수를 걸러내어 움막 안에 큰 가마솥을 걸고 불을 때여 소금을 굽던 재래식 제염막을 말한다. 여기에서 받아들인 세염을 저장하던 염창이 여러 채 있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염창산이 있다. 이렇게 대벌마을은 어업과 염업을 주업으로 하는 마을이었다. 그래서 『대벌 당제』 민속지를 보면 멀리 제주도, 경상도 등에서도 어부들이 왔으며, 당산제를 지낼 때 시주까지 하였다고 한다. 과거 당산 근처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갈치를 막대기로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어장이 풍성했던 포구 마을이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마을로 변모하게 되었다. 그것은 구한말 이후 지속해서 개간이 이루어지다가 특히 1963년 계화도 간척 공사가 본격화되면서 넓은 갯벌은 농토로 바뀌게 되었다. 현재는 경지 정리가 잘된 농촌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대벌마을 두 마리 새 돌짐대의 영력은 어촌 마을에서 농촌 마을로 변모되면서 그 힘을 잃었으나 대벌마을이 어촌 마을로 번창했을 당시의 생생한 모습을 『대벌 당제』 민속지에 담은 것은 그 의미가 매우 크다.

[100년 동안 생생한 당산제 기록, 『대벌 당제』 민속지]

대벌마을 당산제의 생생한 모습은 1897년부터 1975년까지 기록한 『대벌 당제』 민속지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우리나라 마을에서 기록이 남겨진 사례를 찾기 어려운데, 100년 가까운 기록을 대벌마을에서 찾을 수 있다. 민속학·인류학적으로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여기에는 당산제의 축문, 단자, 제일, 시주자, 시주자의 주소, 성명, 제수 물목과 수량, 시주 금액 등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당산제의 성격, 변천, 규모, 참가자 등에 대하여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대벌 당제』 민속지는 한지 62매에 가로 26㎝, 세로 30㎝ 크기에 필사하였다. 대표적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축문

유(維)

세차(歲次) 기유정월(己酉正月) 임오삭(壬午朔) 구일(九日) 경인(庚寅) 헌관(獻官) 00 감소고우(敢昭告于) 후토지신(后土地神) 간택곡조(簡擇穀朝) 제발고건(齊袚告虔) 복유존령(伏惟尊靈) 강림음언(降臨陰鄢) 구려산좌(驅厲山左) 석복중가(錫福衆家) 중신타유(衆神妥侑) 사린안녕(四隣安寧) 어선송풍(漁船送風) 농묘흡우(農畝洽雨) 가가송경(家家頌慶) 호호정하(戶戶呈賀) 두회기렴(頭會箕斂) 감공박수(敢供薄需) 내향음식(來響飮食) 보자축원(報玆祝願) 복원신령(伏願神靈) 상향(尙饗)

당산제 축문에는 귀신을 쫓고 마을에 복을 주시도록 여러 신이 도와서 마을이 평안하고 고깃배에 순풍, 농사에는 흡족하게 비가 내리어 집집마다 기쁨을 누리게 해달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2. 단자

단자는 여러 사람에게 간단하게 당산제를 알리는 글이다. “우리 마을이 바닷가에 있으며 당산신을 모시고 있는데 그 신통력이 매우 매우 영험하다. 멀리는 바다 밖까지 살펴 주고 가까이는 우리 마을을 보살펴 주니 선상 거민(船商居民)이 모두 그 영험함을 믿는다. 그리하여 배는 순풍을 만나 어업이 잘 되고 마을이 편안해지니 재앙이 적도록 치성을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마을의 재정이 매우 어려워 염치를 무릅쓰고 이 단자를 올려 여러분께 간절히 바라오니 허무맹랑한 일이라 마시고 형제지심(兄弟之心)을 발휘하시어 조금씩 보태시기 바랍니다.” 1897년 단자문 내용이다. 즉 단자문에는 당산제가 왜 필요한가? 마을에 재정 마련이 어려워 마을 사람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3. 제일

대벌마을 당산 제일은 대체로 음력 정월 초사흗날 밤에 거행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때에 따라 다르다. 때로 제일이 음력 2월 초하루로 지낸 것은 마을에 궂은일이 생겨 연기한 것으로 생각된다.

4. 시주자

시주자는 배를 소유한 선주나 벌막 소유자인 경제력 있는 사람이 시주한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대벌마을 사람뿐만 아니라 외지인 명단도 나온다. 안전한 항해와 풍어를 기원하면서 대벌마을 당산 할머니에 정성을 들인 것으로 생각된다. 시주자의 제수 물목과 수량은 다음과 같다.

“시주 김경원, 백미(白米) 오두(五斗), 백목(白木) 십팔척(十八尺), 마포(麻布) 삼촌(三寸), 우두(牛頭) 일수(一首), 정육(正肉) 오근(五斤), 백지(白紙) 삼속(三束), 건포(乾布) 일첩(一貼), 생율(生栗) 일승(一升), 대조(大棗) 일승(一升), 황촉(黃燭) 일쌍(一雙), 육촉(肉燭) 이쌍(二雙), 감곽(甘藿) 삼주지(三注之), 남초(南草) 일파(一把) 무술(戊戌) 십이월(十二月) 일(日)”

제물 물목을 보면 제물 내용과 수량이 제시되어 있다. 특히 백목, 즉 무명 한 필을 말하는데, 이는 제의 때 사용할 ‘베다리기’와 ‘할머니 머리얹기’에 쓰일 무명베를 말한다. 시주 목록을 혼자서 부담하는 시주자는 어업이나 염업의 벌막을 크게 경영하는 실력자로서 당산제에 정성을 들이면 번창할 것이란 믿음에서 협력한 것으로 생각된다. 시주자의 주소를 보면 제주도, 추자도, 보길도, 하거도뿐만 아니라 함경도 길주, 원산, 평양, 해주, 마산, 동래 등으로 한반도 연안의 각지에서 선박이 왕래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부안의 변산반도칠산 어장이 1920년대까지만 하여도 어촌 마을로서 얼마나 풍성했는가를 말해준다. 특히 어선들은 부안읍 시장을 가장 가까이 끼고 있는 대벌 어항을 이용했기에 이런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서 대벌 어항이 쇠퇴하자 제수 비용을 집집마다 부담하도록 하였다. 이렇듯 『대벌 당제』 민속지는 단순히 대벌마을 당산제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상까지 파악할 수 있는 문학 인류학적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대벌 마을 두 마리 새 돌짐대 건립과 유래]

대벌마을 두 마리 새 돌짐대는 현재 마을 중심부인 전라북도 부안군 계화면 대벌길 14[궁안리 410]의 맞은편에 있다. 소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할아버지 당산으로 모셔지는 소나무가 돌짐대 왼편에 있다. 전에는 구지산에서 소나무를 베어다 당산 할아버지로 모셨다. 돌짐대는 아주 특이하게 두 마리의 오리 형태가 올려진 모습으로 전국적으로 흔히 볼 수 없는 두 마리 새를 올린 돌짐대이다. 그리고 현재 돌기둥은 비스듬히 기울어진 상태로 세워져 있다. 그 위에 두 마리의 새 형태 돌이 올려져 있다. 화강암을 불규칙하게 다듬어 만든 새는 서북 방향으로 바다를 향하고 있다. 돌짐대는 높이 360㎝, 사각의 한 면 너비 60㎝, 밑돌레 240㎝이다. 두 마리 새의 크기는 각각 길이 90㎝, 높이 30㎝와 길이 75㎝, 높이 25㎝이다. 새 모양은 모자 관계라도 되는 것처럼 다정하게 보인다. 온기가 느껴진다. 두 마리 새는 크기가 차이가 있고 머리, 몸통, 날개 등을 거칠게 조각했지만 새 모양을 짐작하게 한다. 새는 현재 콘크리트로 부착하여 고정해 놓았다. 대벌마을 두 마리 새 돌짐대는 부안읍 석조 당산과 함께 세워진 연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민속 신앙물이다.

대벌마을 두 마리 새 돌짐대에는 오른쪽 측면에 기록이 남아 있다. ‘별좌(別座) 김자남(金自南) 건융(乾隆) 14년(十四年) 기사(己巳) 정월초구일(正月初九日) 축시(丑時) 입대(立大) 동장(洞丈) 김덕선(金德先) 서기(書記) 김석열(金碩兌)’이라고 새긴 명문이 있다. 당산제를 주관하는 임원으로 별좌, 동장, 서기 등이 언급되어 있다. 별좌는 제물을 준비하는 화주이고, 동장은 이장이다. 그리고 서기는 오늘날과 같이 당산제와 관련한 기록을 담당하는 역할을 맡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명문에 의하면 1749년(영조 25) 정월 9일 한밤중에 이것을 세우고 제를 지냈을 것으로 추측된다. 부안 읍내 서문안 당산은 1689년(숙종 15), 서외리 당간은 1671년(현종 12)에 세워진 연대가 기록된 명문이 남아 있다. 이웃 고창의 오거리 당산에도 가경(嘉慶) 8년, 즉 1803년에 세웠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다. 이는 호남 지역에 대표적인 돌 신앙 문화가 17세기 말에서 18세기에 세워져 있어 당시 사회상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현재 대벌마을 두 마리 새 돌짐대[쌍조석간(雙鳥石竿)]는 1983년 8월 24일 전라북도 민속 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되어 보존하고 있다.

[대벌 마을 두 마리 새 돌짐대 마을제의 특이성]

부안군 대벌마을 두 마리 새 돌짐대 당산은 주당산으로 모셔지는 할머니 당산이다. 할아버지 당산은 구지산에서 소나무를 베어다 세운 것이다. 제일은 보통 음력 정월 초사흗날에 제를 진행하였다. 제관은 다른 마을과 같이 깨끗한 사람으로 제관, 집사, 축관 3명을 선정했다. 그리고 메와 떡을 장만하는 집을 ‘소화주’라 하고, 음식을 장만하는 화주를 ‘육화주’라고 했다. 화주로 선정된 사람은 정월 초하루부터 이틀간 집에서 나오지 않는다. 언제나 목욕재계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후에 제물을 장만하였다. 비용은 집집마다 추렴했다. 제물은 소머리를 비롯하여 삼실과, 시루떡, 나물 등을 준비하여 모셨다. 제의 절차는 진설-분향-제관-재배-축문-소지–음복 등의 순으로 유교식 절차에 의해 진행되었다. 그리고 보통 부안 지역 당산제는 집단의 단결을 잘 나타내주는 줄다리기를 행한 후 그 줄을 당산이나 짐대에 감는 소위 ‘당산 옷 입히기’를 했다.

그런데 대벌마을 두 마리 새 돌짐대 당산에서는 특이하게 ‘베다리기’가 전한다. ‘베다리기’는 ‘줄다리기’가 줄을 당기는 것이듯 무명베를 당기는 것을 말한다. ‘베다리기’는 무명베를 양쪽에서 잡아당겨 끊어진 표시로 보아 제가 정성스럽게 지내졌는지를 판가름했다. 즉 제가 정성스럽게 지내졌으면 베가 쉽게 끊긴다. 그러면 밤을 새워 풍물굿을 치면서 흥겹게 놀았다. 그런데 정성이 부족했다면 무명베가 옆으로 비스듬히 찢어지거나 전혀 끊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이럴 때는 다른 날을 정해 당산제를 다시 모셨다고 한다. 또한 ‘머리얹기’라 하여 짐대에 올려진 두 마리 새에 ‘베다리기’한 무명베로 감아준다. ‘머리얹기’란 당산 할머니 머리에 낭자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베다리기’를 한 다음 ‘머리얹기’를 하는 의식은 ‘줄다리기’를 한 다음 ‘당산 옷 입히기’를 한 것의 변형임을 보여준다. 이는 대벌마을이 어촌이어서 줄다리기용 볏짚을 구하기가 어려워 무명베로 대치되면서 ‘베다리기’로 변형된 것으로 추측된다. 제를 마친 후에 마을 회의를 열어 제비 결산 및 마을 대소사에 관련하여 논의하고 마당밟기를 하며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대벌 마을 두 마리 새 돌짐대 당제 복원을 꿈꾸는 사람]

부안군 대벌마을 두 마리 새 돌짐대 당산제는 아쉽게도 현재는 중단된 상태이다. 『대벌 당제』 민속지를 통해 1897년부터 1975년까지 당산제의 생생한 모습을 알 수 있는데, 1975년을 마지막으로 ‘베다리기’와 ‘머리얹기’를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대벌마을 당산제에서는 많은 영험한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즉 “어느 추운 겨울에 헐벗은 거지가 ‘머리얹기’라 하여 돌짐대를 감싼 무명베를 밤에 몰래 벗겨 가려고 올라갔다가 몸이 할머니 당산에 붙어버려 동사한 일이 있다.”라고 한다. 그 영험함을 되찾기 위해 최근 당산제를 복원할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였다. 대벌마을 배인태 이장을 비롯하여 마을 사람들은 다시금 풍요로웠던 대벌마을을 꿈꾸면서 당산제 부활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대벌마을의 두 마리 새 돌짐대는 전국적으로 매우 보기 드문 형태이다. 또한, 그 의식에 있어서도 ‘줄다리기’를 하고 ‘당산 옷 입히기’를 하는 일반적인 당산제 행사와 달리 무명베를 이용하여 ‘베다리기’와 ‘머리얹기’를 하는 매우 특이한 형태로 의식이 변형되었다. 특히 대벌마을에는 100년간의 『대벌 당제』 민속지 기록은 무엇보다도 큰 자산이다. 그래서 당산제 부활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제 다시 마을 사람들의 의기투합이 필요한 시점이다. 변산반도칠산 어장의 풍요로웠던 시절을 다시금 맞이하길 원하며 대벌마을 당산제의 부활을 기대해 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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