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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 주씨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7001
한자 新安朱氏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집필자 최정용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 지역에서 송나라 주잠(朱潛)을 시조로 하는 세거 성씨.

[개설]

신안 주씨(新安朱氏)의 본관은 중국 안휘성(安徽省) 휘주부(徽州府) 신안(新安) 지역이다. 성씨의 역사를 살펴보면, 신안 주씨는 중국 송나라 신안현 사람인 주잠(朱潛)이 고려 고종 때 우리나라에 와서 나주(羅州)에 정착하면서부터 그를 시조로 하여 계대를 이어오고 있다. 주잠은 주자(朱子)의 증손으로 송나라 사직이 위태롭게 되자 아들 주여경(朱餘慶)을 데리고 바다를 건너 망명해 와서 나주에 자리 잡고 살았다고 『조선 씨족 통보(朝鮮氏族統譜)』에 기록되어 있다. 후에 원나라에서 송의 유민을 압송하려 했을 때 이름을 주적덕(朱積德)이라 고치고 능성(綾城) 고정리(考亭里)에 은거하였다가 여러 곳으로 이거하여 지명에 따라 따로 본관을 사용해 온 관계로 신안(新安)·나주(羅州)·능성(綾城) 등 45개 파로 갈리었다.

1902년 종의에 의해 의정부 찬정 주석면이 상소, 우리나라 모든 주씨는 시조의 고향인 신안으로 본관을 통일하였다. 주씨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31명을 배출하였다.

[연원]

신안 주씨는 주자[주희]를 시조로 한 1본관(本貫) 1족성(族姓)의 혈족(血族)이다. 한국 시조[동국 시조]인 주잠의 자(字)는 경도(景陶), 호(號)는 청계(淸溪)이다. 주잠은 중국 남송(南宋)의 유명한 유학자인 주희(朱熹)의 증손(曾孫)이다. 주잠은 남송이 원나라에 패망하자 1224년에 고려로 망명을 한다. 망명 후 고려왕의 벼슬을 거부하고 재야 사림(在野士林)으로 청절(淸節)한 기풍(氣風)을 지켰다. 그 뒤 후손들이 벼슬길에 나가면서 근 700여 년 동안 세거지를 따라 관향(貫鄕)을 사용함으로써 능주(綾州), 나주(羅州), 전주(全州), 웅천(熊川), 함흥(咸興) 등의 여러 세거지 본관(本貫)을 사용해오다가 1902년(고종 39)에 종중의 합의로 의정부 찬정(議政府 贊政)인 월산(月山) 주석면(朱錫冕)이 대표가 되어 고종에게 상소하여 왕의 조서(詔書)가 내려짐으로써 신안(新安)을 본관으로 통일하게 되었다. 통일된 본관인 신안은 중국의 옛날 지명으로 하남성(河南城) 신안면(新安面)이다. 현재의 지도에는 강서성(江西城) 무원(婺源)으로 표시되어 있다.

주잠의 아들 주여경(朱餘慶)[5세]은 고려 고종 때 은사과에 올랐고, 주여경의 아들 주열(朱悅)[6세]도 문과에 올랐다. 특기할 점은 주열은 천성이 활달하고 관직이 높아도 검소하였다. 문장에도 능하고 글씨도 뛰어나 원종의 신임이 매우 두터웠다. 원종 때 병부랑중(兵部郞中)으로서 충청·경상·전라 안렴사로 나가 크게 치적을 올렸으며, 충렬왕 때는 1품직인 지도첨의부사(知都僉議府事)에 이르렀고 능성군(綾城君)에 봉해졌다. 주열이 충렬왕 2년에 정조사(正朝使)로 원나라에 파견되었는데 원나라에서 요구한 공녀 2,000명과 일본 공략에 대비한 선박 공출을 철회시킨 일이 있다. 이것은 원사(元史)에도 기록되어 있다.

문정공 주열에게는 고위 관직에 오른 주인장(朱印章)[정숙공, 예부 상서], 주인원(朱印遠)[문간공, 병부 상서], 주인환(朱印還)[첨의부사공, 첨의 부사] 등 아들 3형제가 있었다. 조선조에 들어서면서 주인장과 주인원의 후손들은 이성계가 개국을 하자 새 왕조에의 충성을 거부했다. 이 때문에 조정으로부터 박해를 받았고 조선조의 벼슬길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막내인 주인환은 일찍이 이성계의 고조부 목조(穆祖)와 함께 전주(全州)에서 함경도로 옮겨 살게 되면서 인연을 맺어 그의 아들 주단(朱端)은 이성계의 왕고모부가 되었다. 서울로 도읍을 옮겼을 때 주단은 검교 한성윤(檢校漢城尹)을 지내는 등 이성계의 오른팔 노릇을 했으나 태종[이방원]의 등극으로 시련을 겪었다. 주인(朱印)은 태조 이성계가 함흥(咸興)으로 갈 때 조정을 떠나 동행했다.

신안 주씨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 본을 숨겨야 하고 벼슬길에 나가지 못할 만큼 핍박을 받았음에도 임진왜란 등의 국난에서는 의병을 일으켜 선봉에서 왜적과 싸웠고, 구한말에는 주석환(朱錫煥) 등의 독립투사도 많이 배출하였다. 주기철(朱基徹)은 웅천(熊川)[창원시 진해구 소재]에서 남학회(南學會)를 조직하여 애국 사상을 고취하고 3·1 만세 운동 때 시위를 주동한 뒤에 뜻한 바 있어 목사가 되었다. 예수 장로회 목사로 평양 산정현(平壤山亭峴) 교회에서 신앙 구국의 일념으로 헌신하였다. 일제 강점기 말에는 신사 참배를 끝까지 거부하여 10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에 순교하였다.

[입향 경위]

창원시 진해 지역에 주잠을 시조로 하는 신안 주씨의 후손들이 언제부터 들어와 세거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경위는 불분명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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