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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경 모반 밀계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00235
한자 張時景謀叛密啓事件
영어의미역 Confidential Report to the King Event of Jang Sigyeong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면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호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역모 고변
발생(시작)연도/일시 1800년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861년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인동
관련인물/단체 채홍원

[정의]

조선 후기 순조 즉위년에 인동에서 일어난 역모 고변(告變) 사건.

[개설]

순조 즉위년인 1800년에 정조 독살설의 영남 유포에 따른 인동의 장시경 형제가 서울로 진격, 노론 벽파 세력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려고 했다는 역모 고변으로 인해 일어난 인동작변(仁同作變) 사건이다.

[역사적 배경]

영조 이후 인동의 남인계 재지 사족들은 중앙 진출에 거듭 실패하면서 정치적으로는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인동 지역의 대표적인 사족인 인동장씨와 관련된 인동작변은 수령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에 있었던 당시 지역 사족의 현실 불만이 정조 독살설로 영남에 유포되면서 일어난 사건이다.

[발단과 경과]

1800년(정조 24) 6월 28일에 정조가 갑자기 승하하고 인산(因山)이 이루어지지도 않았으나 당시 인동부사였던 이갑회(李甲會)는 풍악을 울리면서 부친의 생신연을 마련하였다. 이에 분개하던 장윤혁(張胤爀)[1734~1800]이 생신 잔치의 초청을 거절하자 이갑회는 추석날 장윤혁의 후원에 소머리를 던져놓고는 인산 전에 소를 도축하였다는 혐의로 장윤혁의 가노(家奴)를 구금하였다. 그리고 항의하던 인동장씨 일가와 군졸의 충돌이 있자 이갑회는 장씨 일가를 정조의 독살설에 연결시키면서 장씨 일가가 관아를 침범하여 무기와 군량을 탈취한 다음 서울로 진격하려고 한다는 혐의로 체포토록 하였다.

이에 장윤혁의 아들 장시경 형제는 천생산으로 도망가서 낙수암[미득암]에서 자살하였다. 일이 여기까지 이르자 이갑회는 경상감사 김이영(金履永)에게 장씨 형제들이 모반을 일으키려 하였다고 보고하였다. 감사는 8월 29일에 중앙으로 보고하였으며, 중앙에서는 이서구를 안핵사로 선임하여 파견하였다. 9월 23일에 안핵사 이서구와 경상감사 김이영은 모반사건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장씨 일문에 대한 대대적인 처벌이 이어졌고 인동은 10월 도호부에서 현으로 강등되었다.

[결과]

사건이 일어난 지 10년만인 1810년 인동장씨 수감자 가운데 장윤종과 장윤문(張胤文)의 아들 형제가 석방되어 인동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장시호의 아들 장석규(張錫奎)는 여전히 전라도에 있는 신지도에 유배되어 있었다. 1844년에 대구감영에 있었던 사건에 대한 기록물을 통해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장석규는 모반 사건에 대해 신원을 노력하였다. 1858년에 인동장씨 참봉 장석봉으로부터 사건을 보고 받은 국구(國舅) 김문근의 도움으로 1859년(철종 10)에 재심리가 이루어져 마침내 1861년 신원이 이루어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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