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717
한자 具榮儉 追慕碑
이칭/별칭 선충익찬공신 중대광 전리판서 면성군 추모비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비
지역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남로 203-36[서변동 1271]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구본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356년 5월 - 구영검 사망
건립 시기/일시 1984년연표보기 - 구영검 추모비 건립
현 소재지 모선당 앞 -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남로 203-36[서변동 1271]지도보기
원소재지 모선당 앞 -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남로 203-36[서변동 1271]
성격 추모비
양식 귀부(龜趺)|비신(碑身)|이수(螭首)
관련 인물 공민왕(恭愍王)|최영(崔瑩)|유탁(柳濯)|원호(元顥)|한가귀(韓可貴)|기철(奇轍)|김성(金成)
재질 오석
크기(높이, 너비, 두께) 184㎝[높이]|62㎝[너비]|32㎝[두께]
소유자 능성구씨 좌정승공파
관리자 능성구씨 좌정승공파

[정의]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에 건립된 고려 후기 문신 구영검의 추모비.

[개설]

구영검 추모비(具榮儉追慕碑)[선충익찬공신 중대광 전리판서 면성군 추모비(宣忠翊贊功臣重大匡典理判書沔城君追慕碑)]는 고려 후기에 전리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인 구영검[?~1356]을 기리고자, 대구광역시 지역에 모여 사는 후손들이 1984년에 세운 추모비이다. 구영검은 본관은 능성(綾城), 초명은 구정(具貞)이다. 충청도 면천(沔川) 출신이며 여러 벼슬을 거쳐 전리판서에 이르렀으며, 1354년(공민왕 3) 면천군(沔川君)에 봉하여졌다.

[건립 경위]

현재 구영검의 묘소는 북한 지역인 황해도 신천에 있어서 남한에 사는 후손들은 성묘와 제향을 드릴 수 없다. 특히 자손들이 많이 사는 대구 지역의 능성구씨 후손들은 제향을 드리며 추모하고자 1984년 구영검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위치]

구영검 추모비는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남로 203-36[서변동 1271]에 있는 모선당(慕先堂) 앞에 세워져 있다

[형태]

구영검 추모비는 높이 184㎝, 너비 62㎝, 두께 32㎝의 크기이며 재질은 오석이다. 귀부(龜趺), 비신(碑身), 이수(螭首)를 갖춘 전형적인 비석 형태이다.

[금석문]

구영검 추모비에는 ‘고려 선충익찬공신 중대광 전리판서 면성군 구공추모비(高麗 宣忠翊贊功臣 重大匡 典理判書 沔城君 具公追慕碑)’라는 비제가 적혀 있고, 구영검에 대한 소개와 추모의 뜻 등을 한자로 기록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군(府君)의 휘(諱)는 영검(榮儉)이요 성은 구씨(具氏)이다. 능성(綾城) 씨족(氏族)의 시조는 고려조에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벽상삼한(壁上三韓) 삼중대광 검교상장군(三重大匡 檢校上將軍)에 오른 휘 존유(存裕)이다. 공은 상장군의 현손이다. 증조 휘 민첨(民瞻)은 문과에 합격하여 전주목사 녹참군 겸 장서기 동평장사(全州牧司 錄參軍 兼 掌書記 同平章事)를 역임하였다. 11대손인 문단공(文端公) 봉령(鳳齡)이 묘표(墓表)를 지었으며, 중건묘표는 영상(領相) 조현명(趙顯命)이 지었다. 조고 휘 연(珚)은 문과로 안동면 도감판관(安東面 都監判官)으로 문하좌정승(門下左政丞)에 추증(追贈)되었으며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에 봉군(封君)되었다. 부제학(副提學) 이종우(李鍾愚)가 묘표를 지었다. 아버지 휘 예(藝)는 문과에 장원하여 중대광 판전의사(重大匡 判典儀事)로 면천(沔川)의 땅을 하사(下賜)받았으며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에 봉군되었다.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묘갈명을 지었다. 어머니는 아주신씨(鵝洲申氏)니 도염서령(都染署令) 진승(晋升)의 딸이다.

부군은 나면서부터 범상(凡常)하지 아니하였으며 기상(氣相)이 헌출하고 풍채(風彩)가 늠름하여 사람들이 다 공경하고 경외하였다. 조년(早年)에 과거에 합격하여 선충익찬공신(宣忠翊贊功臣)에 책록(策錄)되고 중대광 전리판서(重大匡 典理判書)로 면성군(沔城君)에 봉군(封君)되었다. 본래 장재(將材)의 인망(人望)이 있어 최영(崔瑩), 유탁(柳濯) 등과 같이 고우성(高郵城)을 정벌할 때 공(功)을 세우고 돌아왔다. 그 뒤 기철(奇轍)의 옥사(獄事)가 있었는데 원호(元顥)가 임금에게 참소하여 말하기를 ‘구모(具某)가 한가귀(韓可貴)와 모의하여 기철(奇轍)의 무리를 잡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왕(王)이 노하여 순군옥(巡軍獄)에 가두도록 하였다. 김성(金成) 등이 왕명(王命)을 사칭하여 해치려고 하였다. 왕이 이를 알고 사람을 보내어 중지시키려 하였으나 이미 참형(斬刑)이 된 뒤였다. 조야(朝野)가 다 크게 애석해하였으니 이때가 공민왕(恭愍王) 병신년[1356년] 5월이었다.

아! 하늘이 장차 한 시대의 치세(治世)를 펼치려고 하면 반드시 당대(當代)의 어진 신하로 하여금 보필케 하여 어진 교화를 펼치게 하나니, 명령하는 바가 바르게 행하여지지 아니함이 없다. 뭇 신하와 백성들은 그 직분으로써 임금의 명령을 듣고 감히 사사로이 행함이 없어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백성 또한 그 백성으로서의 직분을 다하게 된다. 만약에 간신배가 그 지위에 앉아서 권력을 남용하게 되면 정사(政事)가 바르게 행하여지지 아니하고 국사(國事)가 문란하여지게 된다. 부군은 한 시대의 어진 신하로서 끝내 한 시대를 보좌하여 치세(治世)의 영광을 이루지 못하였고, 큰 업적이 있었으나 또한 사적이 민몰(泯沒)되어 전하지 아니하니 후손들이 깊이 개탄하고 한스러워하는 바이다. 묘소는 신천 두라방 노촌 구릉현(信川 頭羅坊 蘆村 具陵峴) 아래 계좌(癸坐)에 있다. 18대손 영조(永祖)가 묘표(墓表)를 지었다. 배위(配位) 죽산안씨(竹山安氏)는 정당문학(政堂文學) 규(珪)의 딸이요, 계배(繼配) 경주김씨(慶州金氏)는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 자장(子章)의 딸이다. 묘소는 함께 같은 언덕에 있다.[하략]

아! 강토가 분단된 이후로 향화(香火)를 받들지 못하여 봄에 비 내리고 가을에 이슬 내릴 때에 출척(怵惕)의 정(情)을 이기기 못하였는데, 지난 신유년(1981)에 산재한 여러 후손들이 논의하여 힘을 모아 대구시 창포산(菖蒲山)에 모선당(慕先堂)을 건립하여 1년에 한 번 제향을 올리니 추모의 정성을 조금이나마 펼 수 있었다. 엎드려 생각하오니 부군의 영령(英靈)이 반드시 여기에 오르고 내리시리라.

여러 종인(宗人)이 나에게 추모비문(追慕碑文)을 청하니 참람하고 외람됨을 무릅쓰고 전말을 이와 같이 간략하게 서술하노라. 명(銘)을 하노라.

큰 철인(哲人)과 장군, 재상들이 대를 이어 계승되었도다. 부군이 빼어나게 탄생하니 나라의 보배로다. 흉중(胸中)에는 은하수를 머금고 기상은 우레와 같이 뛰어났네. 큰 지략으로 임금을 도우니[翊贊] 지위는 선충(宣忠)에 올랐네. 충성으로 나라 은덕 보답하니 백세토록 아름다운 향기 남으리라.

단기 4317년 갑자년(1984) 중추절 후손 태회(泰會) 삼가 짓고, 야성인(冶城人) 송석희(宋錫熙) 삼가 쓰다.

[府君, 諱 榮儉, 姓具. 綾城氏之上祖, 高麗, 文魁 壁上三韓 三重大匡 檢校上將軍, 諱 存裕之玄孫也. 曾祖, 諱 民瞻, 文科, 全州牧司 錄叅軍 兼 掌書記 同平章事. 十一世孫, 文端公 鳳齡撰, 墓表, 重建墓表, 領相, 趙顯命撰. 祖, 諱 珚, 文科, 安東面 都監判官 贈門下左政丞 沔城府院君. 副提學, 李鍾愚撰, 墓表. 考, 諱 藝, 文魁 重大匡 判典儀事, 賜鄕沔州, 封沔城府院君. 高峯奇大升撰, 墓碣銘. 妣, 貞敬夫人 鵝洲申氏, 都染署令, 晋升女. 府君, 生而非凡, 氣宇軒昻, 風彩凛凛, 人皆敬畏. 早年登科, 宣忠翊贊功臣, 重大匡 典理判書, 沔城君. 素有將望, 與崔瑩 柳濯等, 征高郵有功而還. 後, 有奇鐵獄事, 元顥譖于王曰, 具某與韓可貴, 不捕轍等. 王怒, 下巡軍獄. 金成 等, 矯命害之, 王知之, 遣人止之, 已就刑. 朝野皆痛惜, 時恭愍丙申五月也. 鳴呼! 天將啓一代之治, 必生一代之賢, 使之輔弼, 賢化發號, 施令罔或不正. 群臣百姓各以其職, 聽命於君, 無敢自恣. 君君臣臣而民亦其民. 若宵人在位, 弄其秉柄, 則政不正, 國事亂矣. 府君, 以一代之賢, 不得竟佐一代之治, 咳唾之遺, 亦泯沒無傳, 後孫之深所慨恨也. 墓在信川 頭羅坊 蘆村 具綾峴下, 負癸原. 十八世孫永祖撰, 墓表. 配, 貞夫人 竹山安氏, 政堂文學, 珪女, 繼配, 貞夫人 慶州金氏, 興寧府院君, 子章女. 墓幷同原. 有四男三女, 男長 褘, 中顯大夫 少府尹, 贈門下左政丞 特進輔國崇祿大夫, 沔城府院君, 諡文貞. 次 興, 文科, 判典儀寺事. 次 僖, 次 義, 上正議工曹典書. 女, 文化人 柳繼祖, 選部尙書. 沔川人 卜玄啓, 典書. 權鎬, 判厚德府事. 褘, 男 鴻, 左政丞. 成亮, 判安東. 成老, 都元師. 成祐, 判書. 成德, 宰臣. 興, 男 賢輔, 郞將. 賢器, 監務. 忠老, 林川郡事. 義, 男 成美, 參判. 爰立, 文川郡事. 餘不錄. 粤! 自彊土分斷, 香火未奉, 春雨秋霜, 不勝怵惕之情矣. 徃在辛酉, 散在諸孫, 合議謀力, 建慕先堂于大邱市 菖蒲山, 歲一薦苾, 少伸追慕之誠. 伏惟府君之靈, 必降陟于斯矣. 僉宗責余, 追慕碑文, 不顧僭猥, 略叙顚末焉. 銘曰,

碩哲將相, 繼世繩繩. 府君挺生, 爲國禎祥. 胷呑河漢, 氣陵風霆. 翊贊洪猷, 位登宣忠. 以忠報國, 百世遺芳.

檀紀 四千三百十七年 甲子 仲秋節, 後孫 泰會謹撰. 冶城人 宋錫熙 謹書.]

[현황]

구영검 추모비는 관리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의의와 평가]

구영검 추모비는 선조를 기리며 추모하는 숭조(崇祖) 정신을 잘 보여 주는 사례이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