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0284
한자 檢丹洞
영어공식명칭 Geomdan Dong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대구광역시 북구 검단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전영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연표보기 - 경상북도 달성군 성북면 검단동 개설
변천 시기/일시 1938년 - 경상북도 달성군 성북면 검단동에서 경상북도 대구부 검단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49년 - 경상북도 대구부 검단동에서 경상북도 대구시 검단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63년 - 경상북도 대구시 검단동에서 경상북도 대구시 북구 검단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81년 - 경상북도 대구시 북구 검단동에서 대구직할시 북구 검단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95년 - 대구직할시 북구 검단동에서 대구광역시 북구 검단동으로 개편
성격 법정동
면적 3.81㎢
가구수 3,198세대
인구[남/여] 6,532명[남자 3,249명|여자 3,283명]

[정의]

대구광역시 북구에 속하는 법정동.

[개설]

검단동(檢丹洞)은 대구광역시 북구 법정동 31개 중 하나이다. 검댕이 또는 검단으로 불렸다.

자연 마을로는 검단뱃나들[검단뱃나들이, 검단나루터], 검단동 토성[검단토성, 금단토성], 동변검단나루터 등이 있다. 검단뱃나들은 검단동의 나루터이자 자연 마을의 명칭이다. 다리가 없던 시절, 검단동불로동을 이어주던 금호강의 나루터였다. 나루터 일대에 주막을 비롯하여 가옥이 형성되어 ‘검단뱃나들’이라 불렀다. 19세기 후반 순흥안씨(順興安氏)와 우계이씨(羽溪李氏)가 검단마을을 개척하였다고 전하여 온다. 조선 후기까지 ‘금단(琴壇)’이라는 지명을 가졌다가 일제강점기에 검단토성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검단’으로 불리게 되었다.

[명칭 유래]

과거에는 검댕이 또는 검단이라 불렀다. 신단(神壇)이 있어서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 해서 처음에는 ‘금단동(琴壇洞)’이라 하였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들의 발음 때문에 ‘검단동’으로 바뀌었다.

[형성 및 변천]

1914년 경상북도 달성군 성북면 검단동으로 개설되었다. 1938년 경상북도 대구부 북부출장소에 편입되었다. 1949년 대구부가 대구시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1963년 북부출장소가 북구로 승격되면서 경상북도 대구시 북구 검단동이 되었다. 행정구역 명칭 변경으로 1981년 대구직할시 북구 검단동, 1995년 대구광역시 북구 검단동이 되었다. 1997년 검단동 일부를 산격동으로 넘겨 동 경계를 조정하였다. 법정동인 검단동은 행정동과 지명이 동일하다.

[자연환경]

검단동 일대는 금호강 변에 있어 금호강 범람으로 인한 범람지[사력토 및 이토]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금호강 제방 축조 이전에는 황무지였으나, 제방 축조 이후 논농사 지대로 변모하였다. 검단동 남동부는 검단토성이 위치하는 구릉지로 왕옥산(王屋山)으로 불린다. 왕옥산은 대구 분지와 동일한 중생대 백악기 하양층군의 함안층[대구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황]

검단동의 면적은 3.81㎢이며, 인구는 2021년 9월 30일 현재 총 3,198가구에 6,532명[남자 3,249명, 여자 3,283명, 외국인 제외]이다. 북구 산격동·동변동, 동구 지묘동·봉무동·불로동, 북구 복현동 등지와 경계를 이룬다. 검단동의 가운데를 동서로 경부고속도로가, 서쪽을 검단공단로가, 남쪽을 검단로가 통과한다. 북쪽과 동쪽, 남쪽은 금호강 변에 접하고 있어 접근성에 다소 제약이 따른다.

검단동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경부고속도로를 기준으로 북쪽은 미개발지로 방치된 상태이다. 남쪽에는 검단일반산업단지가 위치한다. 유적으로는 검단토성이 있다. 검단토성은 삼국시대 초 토성으로 알려져 있으며, 남쪽 토성 일부만 남아 있다. 검단토성이 있는 왕옥산에는 송담(松潭) 채응린(蔡應麟)압로정(狎鷺亭)과 유허비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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