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719
한자 具鴻 追慕碑
이칭/별칭 송은 구선생 추모비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비
지역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남로 203-36[서변동 1271]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구본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84년연표보기 - 구홍 추모비 건립
현 소재지 모선당 앞 -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남로 203-36[서변동 1271]지도보기
성격 추모비
양식 귀부(龜趺)|비신(碑身)|이수(螭首)
관련 인물 구홍|구영검|구위
재질 화강석
크기(높이, 너비, 두께) 184㎝|62㎝|32㎝
소유자 능성구씨 좌정승공파
관리자 능성구씨 좌정승공파

[정의]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에 건립된 고려 후기 문신 구홍의 추모비.

[개설]

구홍 추모비(具鴻 追慕碑)[송은 구선생 추모비(松隱 具先生 追慕碑)]는 고려 후기 우왕(禑王)[재위 1374~1388] 때 문신인 구홍을 기리고자, 대구광역시 지역에 모여 사는 후손들이 1984년에 세운 추모비이다. 구홍은 본관이 능성(綾城)으로, 능성구씨 7세(世)이며, 호는 송은(松隱)이다.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 등을 역임하였으며,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절의를 지킨 두문동칠십이인(杜門洞七十二人) 중 한 명이다.

1403년(태종 3년) 좌정승에 추서되고 시호 문절(文節)이 내려졌다.

[건립 경위]

현재 구홍의 묘소는 북한 지역인 경기도 개성에 있어서 남한에 사는 후손들은 성묘와 제향을 드릴 수 없다. 특히 자손들이 많이 사는 대구 지역의 능성구씨 후손들이 제사를 지내고 추모하고자 1984년 구홍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위치]

구홍 추모비는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남로 203-36[서변동 1271]에 있는 모선당(慕先堂) 앞에 세워져 있다

[형태]

구홍 추모비는 높이 184㎝, 너비 62㎝, 두께 32㎝의 크기이며 재질은 화강석이다. 귀부(龜趺), 비신(碑身), 이수(螭首)를 갖춘 전형적인 비석 형태이다.

[금석문]

구홍 추모비에는 ‘송은구선생 추모비(松隱具先生 追慕碑)’라는 비제가 적혀 있고, 구홍에 대한 소개와 추모의 뜻 등을 한자로 기록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승국(勝國)의 말엽에 선생은 벼슬이 삼중대광 문하좌정승(三重大匡 門下左政丞)에 이르렀는데 공양왕(恭讓王)조에 이르러 나라의 형세가 심히 어려웠다. 조선의 태종(太宗)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세상을 구제할 뜻이 있었다. 그래서 동년(同年)의 많은 인사들과 의(義)를 부르짖었는데 권근, 변계량, 하륜 등 여러 인사들이 하늘의 아름다운 명(命)에 순응하여 태조(太祖)를 추대하여 나라를 세웠다.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좌정승으로 여러 번 불렀으나 선생은 끝내 나아가지 않으셨다. 조천관(朝天官)을 벗어 버리고 폐양자(蔽陽子)를 쓰고 두문동으로 들어가셨다. 사람들에게 뜻을 보이기를 ‘백이(伯夷)는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고 하였으니 선생은 즉 동국(東國)의 백이(伯夷)셨다. 그 곧은 충심(忠心)과 높은 절개의 밝음은 일월(日月)이 우주에 드리운 것과 같았으니, 무릇 이충(彛衷)이 있는 자 비록 백세(百世)의 뒤라도 어찌 경앙(敬仰)하고 그 유풍(遺風)을 흠모하지 않겠는가?

선생의 초휘(初諱)는 성두(成斗)홍(鴻)으로 개명하였는데 ‘일이 일어날 조짐을 보고 미리 대처한다’는 뜻에서 취한 것이다. 성은 구씨(具氏)요 호 송은(松隱)이요 시호는 문절(文節)이니 능성인(綾城人)이다. 시조 휘 존유(存裕)는 문과에 장원을 하여 벽상삼한(壁上三韓) 삼중대광 검교상장군(三重大匡檢校上將軍)에 이르렀으니 선생의 6대조이다. 고조 휘 연(珚)은 안동면도감판관(安東面都監判官)으로 문하좌정승(門下左政丞)에 추증되었으며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에 봉군(封君)되었다. 증조 휘 예(藝)는 판전의사(判典儀事)로 면주(沔州)를 하사 받았으며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에 봉군되었다.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묘표(墓表)를 지었다. 조고 휘 영검(榮儉)은 선충익찬공신(宣忠翊贊功臣)이요 전리판서(典理判書)로 면성군(沔城君)에 봉군되었다. 아버지 휘 위(褘)는 중현대부 소부윤(中顯大夫 少府尹)으로 문하좌정승(門下左政丞)에 추증되고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에 봉군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어머니는 경주박씨(慶州朴氏)니 문하시중(門下侍中) 세태(世泰)의 딸이다.

선생은 개성에서 출생하였다. 인물이 뛰어나고 대인의 풍도(風度)가 있어 사람들이 다 왕을 보좌할 수 있는 인재로 기대하였다. 성장하면서 학문에 힘써 문장이 날로 뛰어남에 큰 명성이 있었다. 조년(早年)에 등용되어 좌우에서 보필하여 임금을 요순(堯舜)이 되게 하고 정사(政事)는 상나라와 주나라의 치적(治積)을 이루고자 하였으나 천운(天運)이 다함에 동지들과 더불어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생애를 마치셨다. 임종에 임하여 조선조의 관함(官啣)을 쓰지 말 것을 유명(遺命)하였는데 돌아가심에 조선조의 관함을 명정에 쓰니 명정이 저절로 찢어졌는데 이와 같은 것이 세 번이나 있었다. 여조(麗朝)의 관함으로 고쳐 쓰고 난 이후에 명정이 가만히 있었다. 세상에서 ‘송은선생(松隱先生)’이라고 부른다. 묘소는 개풍군 남면 의암동(開豊郡 南面 義菴洞) 문정공(文貞公) 묘소 아래 계좌(癸坐)에 있다. 배위(配位) 파평윤씨(坡平尹氏)는 밀직대언(密直代言) 리(莅)의 따님이다. 묘소는 상하봉인데 뒤에 있다.

4남을 두시니 장남 종지(宗之)는 조선조에 병조참판(兵曹參判)이요 차남 종절(宗節)은 진북절도사 이조참판(鎭北節度使吏曹參判)이요 3남은 종유(宗裕)요 4남 종수(宗秀)는 공조정랑(工曹正郞)이다. 종지의 아들 승중(承重)은 교도(敎導)요, 종절의 아들 익령(益齡)은 지의성군사(知義城郡事)요 익수(益壽)는 공조참판(工曹參判)이요, 종수의 아들 익명(益命)은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였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아니한다.

아! 지금 선생이 돌아가신지 600여년이 되었다. 선생의 늠름하고 위대한 행적은 국사(國史)와 실기(實紀)에 소상하게 수록되어 있으나, 국토가 분단되어 선생의 분묘와 사우(祠宇)에 성묘하고 제향(祭享)을 드리지 못한 것이 이미 40여 성상(星霜)이 되었다. 이제 그 후손들이 아픔을 이기지 못하여 시축(尸祝)을 할 것을 논의하여 대구시의 북쪽 창포산(菖蒲山)에 모선당(慕先堂)을 건립하여 선생과 조부 및 부친을 함께 병향(幷享)하니, 3대의 존령(尊靈)이 타안(妥安)할 장소를 얻었고 또 추모비를 건립하게 되었다(중략) 이어서 명(銘)을 하노라.

의리를 산악(山岳)보다 중히 여기고 충절(忠節)은 해와 달을 꽤 뚫었네. 화살같이 곧은 마음 망복(罔僕) 대부로 두문동에 들어가 굳은 절개 지키셨네. 무엇을 먹으리오? 온 산에 있는 고사리로다. 천년토록 말씀이 길이 전해지고 청사에 필적(筆跡) 오래 남으리라.

단기 4317년 갑자년(1984) 중추절 성균관장(成均館長) 이재서(李載瑞) 삼가 짓다.

[勝國末葉, 先生, 官至三重大匡 門下左政丞, 恭讓之朝, 國步甚艱. 鮮 太宗, 在潛邸, 有濟世之志, 與同年群彦, 倡義. 權近, 卞季良 河崙諸公, 應天休命, 推戴 太祖, 化家爲國. 定鼎于漢陽, 以左政丞累徵, 先生竟不就. 解朝天之冠, 着蔽陽子, 入杜門洞. 言志示人, 伯夷何人我何人, 先生卽東國伯夷也. 其貞忠卓節, 炳然若日月之垂宇宙, 則凡有彛衷者, 雖在百世之後, 孰不敬仰而慕其遺風也哉! 先生, 初諱成斗, 改諱鴻, 取色斯擧之意. 姓具, 號松隱, 諡文節, 系出綾城. 始祖 諱存裕, 文魁 壁上三韓 三重大匡 檢校上將軍, 於先生間六代也. 高祖, 諱 珚, 安東面都監判官, 贈門下左政丞, 沔城府院君, 曾祖, 諱 藝, 判典儀事, 賜鄕沔州, 封沔城府院君. 高峰奇大升撰, 墓表. 祖, 諱 榮儉, 宣忠翊贊功臣, 典理判書, 沔城君. 考, 諱 褘, 中顯大夫 少府尹, 門下左政丞, 沔城府院君, 諡文貞. 妣, 貞敬夫人 慶州朴氏, 門下侍中, 世泰女. 先生生于開城. 骨相俊偉, 有大人之風, 人皆以王佐之才期待. 稍長, 力學文詞日進, 聲名大振. 早歲登用, 左輔右弼, 君致堯舜, 治欲商周, 而其於天運垂訖, 何與同志諸賢, 杜門而終其世. 遺命不書, 朝鮮朝官啣, 及沒書朝鮮朝官啣, 則旌帛自裂, 如是者三. 改書麗啣然後, 旌帛自若, 世稱松隱先生. 墓在開豊郡 南面 義菴洞, 文貞公塋下, 癸坐原. 配, 貞敬夫人 坡平尹氏, 密直代言, 莅女. 墓上下封在后. 有四男, 長 宗之, 朝鮮朝兵曹參判, 次 宗節, 鎭北節度使 吏曹參判, 次 宗裕, 次 宗秀, 工曹正郞. 宗之, 男 承重, 敎導, 宗節, 男 益齡, 知義城郡事, 益壽, 工曹參判, 宗秀, 男 益命, 武科. 餘不收. 鳴呼! 今去先生之世, 六百來歲矣. 先生之凜凜偉蹟, 昭載國史與實記, 而國土兩斷, 先生之墳墓與祠宇, 未能瞻掃薦禋, 已至四十星霜. 今其後孫, 不勝痛欝, 發尸祝之議, 建慕先堂于大邱市 北 菖蒲山, 幷享先生之祖與考, 於是乎, 三代之尊靈, 妥安有所, 又立追慕之石, 成均館副館長, 具滋業甫, 與其族弟滋殷, 聽宗議, 抱家狀而來, 請其刻文, 余同在館任, 誼不敢固辭, 謹依狀而叙之, 系以銘曰

義重山岳, 忠貫日月. 矢心罔僕, 杜門貞節. 食之以何, 滿山薇蕨. 千載永言, 靑史有筆.

檀紀 四千三百十七年 甲子 仲秋節, 成均館長, 李載瑞撰.]”

[현황]

구홍 추모비는 관리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의의와 평가]

구홍 추모비는 선조를 기리며 추모하는 숭조(崇祖) 정신을 잘 보여 주는 사례이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