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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80704
한자 郭越
영어공식명칭 Kwak Wol
이칭/별칭 시정(時靜),정암(定庵)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대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18년연표보기 - 곽월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46년 - 곽월 사마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56년 - 곽월 별시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56년 - 곽월 승문원 정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64년 - 곽월 대동도 찰방 부임
활동 시기/일시 1566년 - 곽월 영천 군수 부임
활동 시기/일시 1572년 - 곽월 사헌부 장령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73년 - 곽월 사헌부 지평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73년 - 곽월 사간원 사간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74년 - 곽월 의주 목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577년 - 곽월 호조 참의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78년 - 곽월 동지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81년 - 곽월 제주 목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581년 - 곽월 청송 부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585년 - 곽월 남원 부사 부임
몰년 시기/일시 1586년연표보기 - 곽월 사망
추모 시기/일시 1859년 - 곽월 남계 서원 배향
출생지 현풍현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대리
거주|이주지 현풍현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대리
부임|활동지 영천군 - 경상북도 영주시
부임|활동지 의주목 - 평안북도 의주군
부임|활동지 청송부 - 경상북도 청송군
부임|활동지 남원부 - 전라북도 남원시
묘소|단소 곽월 묘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대암리
사당|배향지 남계 서원 -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가태리
사당|배향지 신당재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대암리
사당|배향지 앙모재 -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한정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현풍
대표 관직 황해도 관찰사

[정의]

조선 전기 달성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시정(時靜), 호는 정암(定庵). 증조할아버지는 진사 곽승화(郭承華)이고, 할아버지는 현감을 지낸 곽위(郭瑋)이다. 아버지는 증승지(贈承旨) 곽지번(郭之蕃)이며, 어머니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낸 허인(許磷)의 딸 양천 허씨(陽川許氏)와 참의를 지낸 한세신(韓世信)의 딸 청주 한씨(淸州韓氏)이다. 부인은 목사(牧使)를 지낸 강응두(姜應斗)의 딸 정부인(貞夫人) 진주 강씨(晉州姜氏)와 참봉을 지낸 허경(許瓊)의 딸 정부인 김해 허씨(金海許氏)이다. 아들로는 곽재희(郭再禧)·곽재록(郭再祿)·곽재우(郭再祐)·곽재지(郭再祉)·곽재기(郭再祺)가 있다.

[활동 사항]

곽월(郭越)[1518~1586]은 1518년(중종 13) 경상도 현풍현 솔례촌(率禮村)[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대리]에서 출생하였다. 1546년(명종 1)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고, 1556년(명종 11)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임명되었다. 1564년(명종 19) 대동도 찰방(大同道察訪)으로 임명되어 재임 중 권신 윤원형(尹元衡)의 시종이 도포를 입고 신을 신고 계단으로 올라가므로 곤장을 쳤는데, 그 소문을 들을 사람들이 모두 통쾌하게 생각하였다고 전한다. 1566년(명종 21) 영천 군수(榮川郡守)로 임명되어 4년 동안 재임하였다.

영천 군수 임기가 끝난 후에는 고향 솔례촌으로 내려왔다. 그 후 조정에서 대구 부사(大邱府使)·상주 목사(尙州牧使)·성주 목사(星州牧使)로 천거하였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72년(선조 2) 관직에 복귀하여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거쳐 1573년(선조 3)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에 임명되었다. 1574년(선조 4) 의주 목사(義州牧使)로 부임한 후 의주목이 벽지인 것을 보고 백성들의 교화를 위해 학교를 개설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곽월을 기리기 위하여 흥학비(興學碑)를 세웠다. 1576년(선조 6) 의주 목사로 있으면서 시폐(時弊)를 논하는 상소문을 올려 조정의 원로인 이준경(李浚慶)과 백인걸(白仁傑)의 잘못을 논하니, 선조가 노하여 곽월을 국문하려고 하였으나 영의정(領議政) 홍섬(洪暹)이 언로(言路)를 막을 필요가 없다며 비호하여 고초를 피할 수 있었다.

1577년(선조 9) 호조 참의에 임명되었고, 1578년(선조 11)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명나라 황제가 곽월에게 홍금(紅錦)·금안(金鞍)·쌍연(雙硯)·화병(畵屛)·시서(詩書) 등을 하사하였다. 명나라에서 돌아온 후에는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581년(선조 14) 제주 목사에 임명되었는데, 대신들이 제주도는 절도(絶島)이기 때문에 곽월의 나이로 감당하기 어렵다고 주청하여 청송 부사로 바뀌었다. 1585년(선조 18) 남원 부사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병환으로 관직을 그만 두었고, 고향 솔례촌으로 내려와 여생을 보냈다.

[학문과 저술]

유고(遺稿)를 엮어 만든 2권 1책의 『정암 선생 일고(定庵先生逸稿)』가 전한다.

[묘소]

묘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대암리 신당에 있다.

[상훈과 추모]

셋째 아들 곽재우(郭再祐)임진왜란 때 공을 세움에 따라 예조 판서 겸 경연의금부 춘추 판사 세자 시강원 좌빈객(禮曹判書兼經筵義禁府春秋判事世子時講院左賓客)에 증직되었다. 1859년(철종 10)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가태리에 건립된 남계 서원(藍溪書院)에 배향되었다. 남계 서원이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 집권기 때 철폐되자 후손들이 남계 서당(藍溪書堂)으로 복원하였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대암리의 곽월 묘 인근에 재실인 신당재(新塘齋)가 건립되어 있으며, 유가읍 한정리에도 곽월을 기리는 앙모재(仰慕齋)가 건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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