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630
한자 朴貴姬
영어공식명칭 Park Gwihui
이칭/별칭 오계화(吳桂花),향사(香史)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대구광역시 중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석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21년 2월 6일연표보기 - 박귀희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68년 - 박귀희 중요무형문화재[가야금 산조 및 병창 보유자] 지정
몰년 시기/일시 1993년 7월 14일연표보기 - 박귀희 사망
출생지 하판리 -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하판리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성격 국악인
성별 여성
대표 경력 국가무형문화재[가야금 산조 및 병창 보유자]

[정의]

대구에서 활동한 국악인.

[개설]

박귀희(朴貴姬)[1921~1993]는 1921년 2월 6일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하판리에서 아버지 장병관과 어머니 박금영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오계화(吳桂花), 호는 향사(香史)이다.

박귀희는 11세 무렵부터 손광재에게 소리를 배웠으며, 1935년에 박지홍에게 판소리를 배운 후 1936년에 조학진에게 『적벽가』, 1939년에 박동실에게 『흥보가』와 『심청가』, 유성준에게 『수궁가』를 배웠다. 1960년에 박록주에게 『흥보가』를 배웠다. 가야금 병창은 1935년에 강태홍에게 배우고, 1941년에 오태석에게 배워 일가를 이루었다.

박귀희는 1968년에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문화재][가야금 산조 및 병창 보유자]가 되었다. 「사랑가」, 「제비노정기」, 「조자룡 활 쏘는데」 등에 특히 뛰어났다. 가야금 병창을 체계화하고, 현재의 12현 가야금 병창 형태가 음악 양식으로 자리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박귀희는 1993년 7월 14일 향년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활동 사항]

박귀희는 1934년에 이화중선의 대동가극단에 입단하여 활동하였고, 그 후 한양창극단과 동일창극단 등에서 활동하였다. 동일창극단 단장 시절 「일목장군」에서 여창남역(女唱男役)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해방 후 25세 때 대한국악원 설립에 참여하였으며, 대한국악원의 직속 창극 단체인 국극사에서 「선화공주」, 「만리장성」 등에 출연하여 인기를 얻었다. 1948년 9월 여성국악동호회의 결성에 참여하였고, 6·25전쟁 후 여성국극동지사를 만들어 여성국극의 정립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55년 대한국악원 이사, 1962년 국립국극단 단원을 지냈으며, 제3대 국립창극단 단장[1980~1981]을 맡아 창극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1960년 5월 국악인들을 규합하여 국악예술학교[현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를 개교하였다. 그리고 국악 교육 및 민요의 수집, 작곡, 악보화에 노력하였다.

[저술 및 작품]

박귀희의 저서는 『향사 박귀희 가야금병창곡집』[세광출판사, 1979]과 『순풍에 돛 달아라 갈 길 바빠 돌아간다』[새소리, 1994]가 있다.

작품으로는 1964년에 출반한 『한국명창 1·2』에 「녹음방초」, 「제비노정기」, 「청석령 지나갈 제」, 「사랑가」, 「죽장망혜」, 「자룡이 활 쏘는 대목」, 「호남가」, 「골패타령」, 「백발가」 등이 수록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박귀희는 1973년 국민훈장 동백장, 1977년 서울시문화상[예술 부문]을 수상하였다. 1994년 7월의 향사 1주기 추모식 및 향사 동상 제막식, 1995년 향사 2주기 추모음악회 및 향사 유품 전시관 개관, 2003년 향사 박귀희 10주기 추모 기념 공연, 2008년 향사 박귀희 15주기 추모 기념 공연 등 추모 공연과 행사가 열렸다.

2012년부터 향사 가야금병창 전국대회[경상북도 칠곡군]가 해마다 열리고 있으며, 2011년과 2013년에 칠곡군에서 향사 박귀희 명창 학술대회도 개최되었다. 향사 박귀희의 국악 업적을 기리고 전승하기 위한 지역 최초의 국악 전용 예술 공연장인 칠곡향사아트센터[경상북도 칠곡군 석적읍 강변대로 1570]가 2019년 10월 12일 개관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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