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635
한자 朴東鎭
영어공식명칭 Park Dongjin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대구광역시 중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석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16년 7월 12일연표보기 - 박동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73년 - 박동진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적벽가」 인간문화재 등극
활동 시기/일시 1980년연표보기 - 박동진 은관문화훈장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83년 - 박동진 서울시문화상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94년 - 박동진 제4회 동리국악대상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96년 - 박동진 제3회 방일영국악상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98년 11월 - 박동진 박동진판소리전수관 개관
활동 시기/일시 2003년 - 박동진 한국방송대상 국악인상 수상
몰년 시기/일시 2003년 7월 8일연표보기 - 박동진 사망
출생지 무릉동 - 충청남도 공주시 무릉동
성격 국악인
성별 남성
대표 경력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적벽가」 인간문화재|제2대 국립창극단 단장[1975~1979]

[정의]

대구에서 활동한 국악인.

[개설]

박동진(朴東鎭)[1916~2003]은 1916년 7월 12일 충청남도 공주군 장기면 무릉동에서 아버지 박재천과 어머니 경주 최씨 사이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줄광대였고, 작은아버지는 또랑광대였다.

박동진은 완창 시대를 열어 고사 직전의 정통 판소리를 되살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고, 왕성한 공연을 통하여 대중에게 판소리를 알리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판소리 교육자요 지도자로서 판소리창극 발전에 이바지한 바가 크며, 창작 판소리 발표와 실창 판소리 복원을 통하여 판소리 창단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판소리 공연의 전통 양식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박동진의 「심청가」와 「적벽가」는 중고제(中高制)[충청도 지방에서 발달하였으며 동편제와 서편제의 중간적 성격을 띠는 창법]의 성격이 강한 소리이다.

[활동 사항]

박동진은 16세 무렵 판소리에 입문한 후 1945년 무렵까지 김창진, 정정렬, 박지홍, 조학진, 유성준 등 당대의 이름난 명창들에게 소리를 배웠다. 일제강점기에 경상북도 김천시, 경상북도 경주시, 대구 등지의 권번에서 소리 선생을 하였다.

박동진은 1946년에는 대구광역시의 대동권번에서 박지홍 밑에서 소리 사범을 하였다. 그 후 조향창극단(朝香唱劇團)과 햇님국극단, 국립국악원 등에서 활동하였다. 1950년대에는 햇님국극단 등 주로 여성국극단에서 작곡이나 무대감독을 하였고, 1961년부터 국립국악원에 약 14년 동안 재직하였다. 1968년에 「흥보가」 완창을 비롯하여 1969년에 「춘향가」, 1970년에 「심청가」, 1971년에 「적벽가」와 「수궁가」를 완창함으로써 소위 ‘완창 시대’를 열어 고사 위기에 있던 정통 판소리를 되살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973년에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적벽가」 인간문화재가 되었고, 활발한 공연을 통하여 판소리 대중화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박동진은 1969년 무렵부터 실전 판소리 복원과 성서 판소리와 창작 판소리를 발표하여 판소리 세계를 넓혔다. 제2대 국립창극단 단장[1975~1979] 재임 시 풍토를 쇄신하였으며, 「대업」, 「광대가」 등 10편의 창극을 무대에 올려 창극 발전에도 이바지하였다. 1998년 11월 공주에 박동진판소리전수관을 개관하여 제자를 육성하였다.

박동진은 2003년 7월 8일 향년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박동진판소리 다섯 바탕은 물론이고, 1970년 「변강쇠타령」과 1972년 「배비장타령」 등을 복원하고, 1969년 「구주 성탄」과 1973년 「충무공 이순신」 등을 남겼다.

[상훈과 추모]

박동진은 1980년 은관문화훈장을 비롯하여 1983년 서울시문화상, 1994년 제4회 동리국악대상, 1996년에 제3회 방일영국악상, 2003년 한국방송대상 국악인상을 수상하였고, 2003년 7월 9일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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