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680
한자 景德祠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대구광역시 수성구 화랑로42길 31[만촌동 188-1]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구본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00년연표보기 - 경덕사 건립
이전 시기/일시 1951년 - 경덕사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에서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 188-1로 이건
현 소재지 경덕사 - 대구광역시 수성구 화랑로42길 31[만촌동 188-1]지도보기
원소재지 경덕사 -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 지도보기
성격 사당
양식 목조 와가
정면 칸수 3칸
측면 칸수 1칸
소유자 달성하씨 독무재파 종중
관리자 달성하씨 독무재파 종중

[정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에 있는 하시찬을 제향하는 개항기 사당.

[개설]

경덕사(景德祠)는 조선 영조·정조 때 학자인 열암(悅菴) 하시찬(夏時贊)[1750~1828]을 제향하는 곳이다. 하시찬은 심재(心齋) 송환기(宋煥箕)와 경호(鏡湖) 이의조(李宜朝)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심성의 오묘함과 경학(經學)과 예학(禮學)의 요결을 터득하였다. 1789년(정조 13) 39세 때 독무암서(獨茂巖棲)를 짓고 평생 경전을 연구하고 저술하며 교육하였다. 하시찬이 독무암서를 짓고 “산도 아니고 큰 돌도 아닌 홀로 있는 암석, 예부터 전하기를 독무암이라고 이름하였네. 사람들은 바위에 의지하고 바위는 우뚝하니 단정하고 바르게 살고자 하는 나의 바위로다[非山非石一孤巖, 古號流傳獨茂巖. 人獨依巖巖獨茂, 端宜棲息主人巖]”라는 시를 지었다. 독무암서는 하시찬이 타계한 후 독무재(獨茂齋)라고 하였다.

경덕사독무재 경내(境內)에 있다. 1884년(순조 34)에 문인(門人) 서표(徐杓)가 향내의 유림들과 함께 학계(學契)를 설립하고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며 1년에 한 번 제향을 드렸다. 1900년에 이르러 옥산(玉山) 장병지(張柄志)와 임재(臨齋) 서찬규(徐贊奎)가 발의하여 원우(院宇)[사당]를 건립하고 ‘경덕(景德)’이라 편액하였다. 경덕은 ‘선생의 덕을 사모한다’는 의미이다. 1951년에 독무재와 사당이 있던 곳이 경부선 부지에 편입됨에 따라 본래의 위치에서 1㎞ 정도 남쪽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경내에는 ‘열암선생 유허비(悅菴先生遺墟碑)’와 저서인 『열암문집(悅菴文集)』과 『팔례절요(八禮節要)』의 목판을 보관한 장판각(藏板閣)이 있다.

[위치]

경덕사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 188-1에 있다.

[변천]

경덕사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 철로 변에 있다가 1951년에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형태]

경덕사는 목조 와가이며, 동향이다.

[현황]

경덕사는 관리 상태가 양호하다.

[의의와 평가]

하시찬영조·정조 시기 대구 지역에서 강학한 대표적인 유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하시찬이 타계한 후 문인과 후학들이 사당을 건립하여 제향을 한 것으로 보아 하시찬의 학문과 교육 정신이 후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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