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 최치원의 ‘신라 수창군(대구 수성구 전신) 호국성 팔각등루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0014
한자 孤雲 崔致遠- ‘新羅 壽昌郡(大邱 壽城區 前身) 護國城 八角燈樓記’
영어공식명칭 Silla Suchang-gun Hogukseong Palgakdeungrugi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대구광역시 수성구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
집필자 전영권

[정의]

신라 말 대구의 위상과 수창군 호국성의 장소 추정에 필요한 최치원의 기문.

[최치원의 생애와 신라 하대 시대상]

최치원(崔致遠)[857~?]은 강수(强首), 설총(薛聰)과 더불어 ‘신라 3문장(三文章)’의 한 명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최치원은 신라의 주도 세력인 진골 출신이 아닌 6두품 출신이다. 868년(경문왕 8) 12세 때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874년(경문왕 14) 18세에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할 정도의 수재였다. 876년(헌강왕 2) 당나라의 선주(宣州) 율수현위(漂水縣尉)를 시작으로 여러 관직에 올랐고, 885년(헌강왕 11) 귀국할 때까지 많은 글을 남겼다. 역사에 잘 알려진 일명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으로도 불리는 「격황소서(檄黃巢書)」는 명문으로 유명하다.

29세에 신라로 돌아온 최치원은 헌강왕으로부터 ‘시독겸한림학사수병부시랑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郎知瑞書監事)’로 임명된다. 그런데 당시 신라는 지방의 호족 세력이 등장하면서 혼란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894년(진성여왕 8)에는 최치원이 개혁의 청사진을 담은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왕에게 올리고 6두품 최고의 관직인 아찬(阿飡)이 되었지만 진골 귀족들의 극심한 반발로 개혁을 이루지 못하였다. 진성여왕 후임으로 효공왕이 즉위하자 최치원은 40대 초반 나이에 벼슬을 버리고 산천을 두루 다니다 가야산에 입산 후 속세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걸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최치원이 신선이 되었다고 믿는다.

[「신라 수창군 호국성 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 원문]

“천우5년무진동10월(天祐五年戊辰冬十月). 호국의영도장중알찬이재(護國義營都將重閼粲異才). 건8각등루우남령(建八角燈樓于南嶺). 소이자국경이양병흔야(所以資國慶而攘兵釁也).이어왈(俚語曰). 인유선원(人有善願). 천필종지(天必從之). 즉지원구선언(則知願苟善焉). 사무위자(事無違者). 관부금석교질(觀夫今昔交質). 유무상생(有無相生). 범열지명(凡列地名). 개부천의(盖符天意). 시보태위유당호불좌자(是堡兌位有塘號佛佐者). 손우유지호불체자(巽隅有池號佛體者).기동우유별지(其東又有別池). 호천왕자(號天王者). 곤유유고성(坤維有古城). 칭위달불(稱爲達佛).성남유산(城南有山). 역호위불(亦號爲佛). 병비허설(名非虛設). 이필유인(理必有因). 승처소여(勝處所與). 양시사응(良時斯應). 월유중알찬자(粤有重閼粲者). 위대부야(偉大夫也). 승기분지(乘機奮志). 상령준어풍운(甞逞儁於風雲). 역조수신(易操修身). 기상은어수토(兾償恩於水土). 표변이병제삼해(豹變而倂除三害). 사반이익신구사(蛇盤而益愼九思). 기능제잔형진(旣能除剗荊榛). 원필복귀상재(爰必復歸桑梓). 소거즉화(所居則化). 하왕불해(何往不諧). 수내전택숭구(遂乃銓擇崇丘). 축성의보(築成義堡). 임류이흘약단안(臨流而屹若斷岸). 부험이촉여장원(負險而矗如長雲). 어시호정수서기(於是乎靜守西畿). 대종남무(對從南畝). 안무안토(按撫安土). 지아빈병(祗迓賓朋). 내자여운(來者如雲). 납지사해(納之似海). 사동동유탁(使憧憧有託). 능골골무사(能榾榾無辭). 가이지절삼귀(加以志切三歸). 궁행육도(躬行六度). 돈오이조범모성(頓悟而朝凡暮聖). 점수이소왕대래(漸修而小往大來). 개유폄기약수(皆由貶己若讎). 경승여불(敬僧如佛). 상영법사(常營法事). 미애타연(靡㝵他緣). 실탄화중지련(實綻火中之蓮). 독표상하지계(獨標霜下之桂). 황호영실(况乎令室). 소자의가(素自宜家). 사덕유여(四德有餘). 일언무실(一言無失). 풍문옥계(風聞玉偈). 필탁우심(必託于心). 일송금경(日誦金經). 불리어수(不離於手). 시내용자비위연분(是乃用慈悲爲鉛粉). 개지혜위경륜(開智慧爲鏡輪). 가성공창(嘉聲孔彰). 중선보회(衆善普會). 고소위불유차부(古所謂不有此婦). 언유차부자(焉有此夫者). 알찬진시재가대사(閼粲眞是在家大士). 울위봉국충신(蔚爲奉國忠臣). 이반약위간과(以盤若爲干戈). 이보리위갑주(以菩提爲甲冑). 능안일경근섭십추(能安一境僅涉十秋). 기고자지암편고(氣高者志望偏高). 심정자신교필정(心正者神交必正). 내이용년양월경신야(乃以龍年羊月庚申夜). 몽어달불성북마정계사도일대상(夢於達佛城北摩頂溪寺都一大像). 좌연화좌(坐蓮花座). 준극우천(峻極于天). 좌면유보처보살(左面有補處菩薩). 고역여지(高亦如之). 남행어계호(南行於溪滸). 견일여자(見一女子). 인신수용소이연(因訊睟容所以然). 우바이답왈(優婆夷答曰). 시처제성지야(是處是聖地也). 우견성남불산상(又見城南佛山上). 유칠미륵상(有七彌勒像). 누체도견(累體蹈肩). 면북이립(面北而立). 기고주공(其高柱空). 후유수석(後踰數夕). 복몽어성동장산(復夢於城東獐山). 견라한승피취의(見羅漢僧披毳衣). 이현운위좌(以玄雲爲座). 포슬면칭가기산구운(抱膝面稱可其山口云). 이처도순명흥법지열토야(伊處道殉命興法之列土也). 유차지령군래시의(由此地領軍來時矣). 계각내염언왈(洎覺乃念言曰). 천미회화(天未悔禍). 지유용간(地猶容姧). 시위이생명개위(時危而生命皆危). 세란이물정역란(世亂而物情亦亂). 이아우해선각(而我偶諧先覺). 면신후도(勉愼後圖). 금득혼교리징(今得魂交異徵). 목경기상(目擊奇相). 첩기비산익해(輒覬裨山益海). 영참촬양도연(寧慙撮壤導涓). 결보군은(决報君恩). 개륭불사(盖隆佛事). 소원불생명처(所願不生冥處). 편오미군(遍悟迷群). 유의현거법등(唯宜顯擧法燈). 극소병화(亟銷兵火). 원빙승개(爰憑勝槩). 고창여초(高刱麗譙). 설이은강(爇以銀釭). 진어철옹(鎭於鐵甕). 영사촉용개구(永使燭龍開口). 무령수상분구(無令燧象焚軀). 기년맹동(其年孟冬). 건등루이(建燈樓已). 지11월4일(至十一月四日). 요청공산동사홍순대덕위좌주(邀請公山桐寺弘順大德爲座主). 설재경찬(設齋慶讚). 유약태연대덕(有若泰然大德), 영달선대덕(靈達禪大德), 경적선대덕(景寂禪大德), 지념연선대덕(持念緣善大德). 흥륜사지융선주사등(興輪寺融善呪師等). 용상필집(龍象畢集). 장엄법연(莊嚴法筵). 묘의시공덕야(妙矣是功德也). 팔고지구광(八觚之九光). 오야지중(五夜之中). 사조무유불촉(四炤無幽不燭). 유감필통즉내아나정주지연(有感必通則乃阿那律正炷之緣). 유마힐전등지설(維摩詰傳燈之說). 완성쌍미(宛成雙美). 광시고표자(廣示孤標者). 알찬지위의(閼粲之謂矣). 정광여래(錠光如來). 도리천녀(忉利天女). 전공불기(前功不弃). 후세능초자(後世能超者). 현우지위의(賢耦之謂矣). 우야심몽요징졸문(愚也尋蒙遙徵拙文). 비술홍원(俾述弘願). 수감직서기사(遂敢直書其事). 용경장래(用警將來). 차도협망가(且道叶忘家). 공사영립(功斯永立). 성제호국(城題護國). 명역불무(名亦不誣). 더기가과(德旣可誇). 사무소괴자이(詞無所媿者爾).”

[「신라 수창군 호국성 팔각등루기」 요약]

908년(신라 효공왕 12) 겨울 음력 10월에 ‘호국의영도장(護國義營都將)’ 중알찬(重閼粲) 이재(異才)가 국가의 경사를 기원하고 병란(兵亂)을 없애기 위하여 남령(南嶺)에 팔각등루(八角燈樓)를 건립하였다. 지명에는 무릇 하늘의 뜻이 깃들어 있는 법이다. 호국성 서쪽에는 불좌(佛佐) 저수지가, 동남쪽 모서리에는 불체(佛體) 저수지가, 동쪽에는 천왕(天王) 저수지가 있다. 그리고 서남쪽에는 달불성(達佛城)이, 남쪽에는 불산(佛山)이 있다. 중알찬은 훌륭한 인물이다. 뜻을 세울 기회가 오자 일찍이 풍운(風雲) 속에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였고, 품행이 단정하고 하늘의 뜻에 순응한 인물이다.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는 몸과 마음을 다하여 헌신하였고, 혼란이 잦아들자 명예와 권력을 마다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마침내 높은 구릉지에 호국성을 축조하였다. 아래쪽으로 흘러가는 하천을 굽어보며 우뚝 서 있는 모습이 깎아지른 절벽 같고, 험한 언덕을 등지고 가지런히 이어진 모습이 긴 띠 모양의 구름 같다.

고향에서 조용히 국가의 안위를 생각하며 농사짓는 일에 매진하였다. 지역의 백성들을 배려함은 물론이고 친지나 손님, 친구들에게 성의를 다하여 대하였다. 이재의 인품을 알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많아도, 찾아오는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마음은 바다와 같이 넓었다. 귀찮게 부탁하는 일조차도 싫은 내색 없이 자신의 일처럼 대하였다. 불심(佛心)이 지극하여 항상 불법(佛法)과 관련된 일을 경영하였을 뿐 다른 인연에 이끌리는 일은 추호도 없었다. 부인 또한 품성이 어질고 온후하여 말 한마디조차 허투루 하는 일이 없어 모두가 존경한다. 부인 역시 불심이 지극하여 금경(金經)을 외우면서 손에서 놓은 적이 없다. 알찬(閼粲) 그대는 진실로 위인이고 충신이다. 혼란에 처한 지역을 조속히 안정시키는 능력은 탁월하다.

용년(龍年) 양월(羊月) 경신일(庚申日) 밤에 알찬이 꿈을 꾼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달불성(達佛城) 북쪽 마정계사(摩頂溪寺)에서 보니, 연화좌(蓮花座)에 안치된 큰 불상이 하늘 높이 솟아 있고, 좌측에 있는 보처보살(補處菩薩)의 높이 또한 그러하다. 남쪽으로 가다가 시냇가에서 한 여자를 보고는 불상이 하늘 높이 닿아 있는 이유를 물어 보니, 여자 불교 신도가 답하기를 “이곳은 거룩한 땅이라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한다. 호국성 남쪽에 있는 불산(佛山) 위에는 일곱 개의 미륵불(彌勒佛)이 몸을 포개고 어깨를 밟힌 채 북쪽으로 얼굴을 향하고 서서 허공에 높다랗게 걸려 있다. 또 며칠 밤이 지나서 다시 꿈을 꾸었다. 호국성 동쪽 경산에서 새털로 짜서 만든 옷을 입고 있는 나한승(羅漢僧)을 보니, 검은 구름을 방석으로 삼고 무릎을 안은 채 경산의 어귀가 되는 지점 쪽으로 얼굴을 향하고 말하기를 “이차돈(異次頓)이 이곳을 통과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올 때가 되었다”라고 한다. 알찬은 꿈에서 깨어나 이런 생각을 하였다. ‘하늘이 내린 재앙을 후회하지 않았고, 우리의 삶터에는 아직도 간악한 무리들이 들끓고 있다. 시대가 위태로우면 모든 생명 또한 위태롭다. 세상이 어지러우면 물정(物情)도 어지럽게 마련이다. 그런데 나는 우연히 먼저 깨달은 사람처럼 되었으니, 훗날을 위하여 모든 일을 신중히 해야겠다. 지금 꿈속에서 이상한 징조를 보았고 눈으로 기이한 현상을 접하였다. 지금 나라를 위해서라면 어찌 한 줌의 흙이나 한 방울의 물이라도 보태는 것을 부끄러워하겠는가. 단연코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은 아마도 불사(佛事)를 융성하게 하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어두운 곳이 생기지 않게 하고 길 잃은 중생들을 널리 깨우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법등(法燈)을 높이 매달아 병화(兵火)를 속히 해소하여야겠다.’ 그리고 수려한 풍광이 있는 곳에 멋진 누대를 높이 건립한 후, 모든 등잔의 불을 밝혀 철옹성을 진압하여 어둠을 영원히 몰아내고 전쟁으로 인하여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908년 초겨울에 팔각등루를 건립하고, 11월 4일에 이르러 팔공산 동화사 홍순대덕(弘順大德)을 초청하여 좌주(座主)로 삼고 재(齋)를 베풀어 경찬(慶讚)하였다. 이때 태연대덕(泰然大德)과 영달선대덕(靈達禪大德)과 경적선대덕(景寂禪大德)과 지념대덕(持念大德)과 연선대덕(緣善大德)과 흥륜사(興輪寺)의 융선주사(融善呪師)와 같은 고승들이 모두 참여하여 법회를 장엄하게 하였다. 이 모든 일이 참으로 묘하고 묘하다. 이재이재의 부인은 참으로 훌륭한 인품을 가진 인물이다. 최치원인 내가 멀리서 졸문을 써 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그 취지는 큰 서원을 담아 주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감히 그 일을 즉시 기록하여 후세 사람들이 본받았으면 한다. 집안일을 잊고서 도에 헌신한 그 공은 길이 전해질 것이요, 호국(護國)이라고 이름 붙인 성(城)의 명칭 역시 기만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 덕이 이미 자랑할 만한 것인 만큼, 나의 글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하겠다.

[호국성 위치에 대한 고증]

최치원이 사라진 후 908년(효공왕 12) 최치원이 52세에 남긴 마지막 글이 바로 대구 수창군 호국성과 관련된 「신라 수창군 호국성 팔각등루기」이어서 대구로서는 큰 의미를 가진다. 수창은 대구 수성의 전신에 해당하는 신라시대 지명이다. ‘수성(壽城)’이 신라 때는 ‘위화(喟火)’, ‘수창(壽昌)’으로 불렸다. 수창군 속현으로 대구현[달구화현], 화원현[설화현], 하빈현[다사지현], 팔거현이 있어, 대구 전신인 달구벌보다 수성구 전신인 수창이 상위 행정구역이었다.

「신라 수창군 호국성 팔각등루기」에 의하면 대구 지역 상류층인 호국의영도장(護國義營都將) 중알찬 이재가 남령(南嶺)에 팔각등루를 세웠고 이재의 부탁으로 최치원이 기문을 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앞산 대덕산성호국성으로 보는 경우도 있으나 “마침내 높은 구릉지에 호국성을 축조하였다. 아래쪽으로 흘러가는 하천을 굽어보며 우뚝 서 있는 모습이 깎아지른 절벽 같고, 험한 언덕을 등지고 가지런히 이어진 모습이 긴 띠 모양의 구름 같다”는 내용을 고려한다면 앞산 용두토성호국성일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그러나 기문 내용의 지리적 위치를 고려한다면 달리 해석할 수도 있다. “호국성 서쪽에는 불좌 저수지가, 동남쪽 모서리에는 불체 저수지가, 동쪽에는 천왕 저수지가 있다. 그리고 서남쪽에는 달불성이, 남쪽에는 불산(佛山)이 있다.” 즉, 달불성달성토성을, 불산은 앞산[성불산]을 의미한다. 이런 내용을 고려한다면 금호강 변의 검단토성호국성이 될 수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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