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387
한자 大邱刑務所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08년연표보기 - 대구감옥 설치
이전 시기/일시 1910년 - 대구형무소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 21에서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으로 이전
개칭 시기/일시 1923년연표보기 - 대구감옥에서 대구형무소로 개칭
개칭 시기/일시 1961년연표보기 - 대구형무소에서 대구교도소로 개칭
이전 시기/일시 1971년 - 대구형무소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에서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비슬로 2624[천내리 472]로 신축 이전
최초 설립지 대구감옥 - 경상감영 내[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 21]지도보기
주소 변경 이력 대구감옥 -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 지도보기
주소 변경 이력 대구교도소 -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비슬로 2624[천내리 472]
현 소재지 대구교도소 -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비슬로 2624[천내리 472]지도보기
성격 기관단체|공공기관

[정의]

1908년 7월 대구광역시에 설치되어 운영된 교정 시설.

[설립 목적]

대구형무소는 사회로부터 격리·구금된 범법자와 형이 확정된 수용자에게 교정 교화를 통하여 건전한 사회인으로 복귀하도록 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변천]

1894년부터 1907년까지 감옥을 관장하던 관서는 감옥서였다. 1907년 12월 감옥에 관한 사무가 법부(法部) 소관으로 이관되면서 감옥서는 감옥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대구감옥은 1908년 7월 16일 「부령」 제10호에 의거하여 경상감영 내[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 21]에 설치되었다. 1910년 4월 중구 포정동 21에서 중구 삼덕동으로 이전하였고 1921년 김천과 안동에 대구감옥의 분감(分監)을 설치하였다. 1923년 5월 5일 「부령」 제72호에 의거, 대구감옥에서 대구형무소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김천분감과 안동분감은 김천지소와 안동지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대구형무소는 광복 후 미군정청 사법부 관할 아래 운영되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동시에 법무부 소관으로 이관되어 운영되었다. 6·25전쟁 직후 대구형무소 재소자 중 2,574명이 달성군 가창 등지에서 대량학살되는 대구형무소 수감자 학살 사건이 발생하였다. 1961년에 대구형무소에서 대구교도소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1971년 중구 삼덕동에서 현 위치인 달성군 화원읍 천내리 472로 신축 이전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대구형무소의 개소 당시 수감 인원은 형사 피고인 85명에 수형자 89명을 합쳐 모두 174명이었다. 1909년에는 607명, 1910년에는 759명으로 급증하였는데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가 일본에 의하여 강제해산된 이후 일본 침략에 대한 저항의 반증이었다. 3·1운동이 전개된 1919년에는 5,000여 명에 이르는 인원이 수용되기도 하였다. 1930년대는 1920년대 후반 민족운동과 항일 독립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항일 애국지사들이 투옥되어 1,200여 명에서 1,400여 명 수준으로 유지되었다.

대구형무소에는 독립투사들이 많이 투옥되었는데 시인 이육사(李陸史)[1904~1944]의 수인 번호 ‘264’도 대구형무소 복역 시절의 번호이다. 시인 김영랑도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으며 독립운동가 장진홍광복회 총사령관 박상진 의사 등은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1939년 1월 1일 기준 대구형무소 수감자들의 본적을 보면 전체 수형자 1,147명의 본적은 한국·중국·일본에 걸쳐 있고, 국내에 고루 퍼져 있으면서도 경상북도가 가장 많았다.

[현황]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한 독립지사의 수는 총 206명이고 순국선열 가운데 정부로부터 독립운동가로 서훈을 받은 사람은 202명, 미서훈 지사는 4명으로 밝혀졌다.

[의의와 평가]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한 서훈 독립운동가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서훈 독립운동가보다 27명이 많을 만큼 대구형무소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이 가장 많이 투옥된 형무소 가운데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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