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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0993
한자 古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고대/고대
집필자 박성현

[정의]

삼한시대부터 통일신라까지의 대구광역시 지역의 역사.

[삼한시대]

한반도 중남부 지방에서 삼한시대는 위만조선의 멸망[기원전 108년]에서부터 이야기할 수 있다. 위만조선의 멸망을 전후하여 다수의 유이민이 남하하였고, 진한(辰韓)의 성립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낙동강 이서 지역에서는 변진(弁辰) 혹은 변한(弁韓)이 성립하였다. 3세기 중엽의 모습을 전하는 『삼국지』 동이전에 의하면, 진한·변한은 각각 12개의 대표적인 ‘국(國)’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그중 큰 것은 4000~5000가(家), 작은 것은 600~700가 정도 되었다. 대구 지역은 진한에 속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비교적 대국이 위치하였을 가능성이 있지만, 동이전에 열거된 진한 12국 가운데 어느 것이 대구에 비정될 수 있는지 명확하게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대구의 가장 오래된 지명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달구벌(達句伐)’인데, 달구벌과 유사한 것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고고학에서는 이 시기를 원삼국시대라고 하는데, 영남 지역에서는 주로 목관묘와 목곽묘가 조영되었으며, 대구 지역의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팔달동 유적이 있다. 이 밖에 평리동 유적의 경우 유구는 불분명하지만 나무널무덤[목관묘] 단계로 추정되며 다양하고 풍부한 청동 유물이 출토되었다. 평리동 유적을 남긴 집단은 다음 단계에 비산동의 나무덧널두덤[목곽묘]을 조영한 것으로 보이며, 당시 대구 지역에서 중심적인 읍락, 즉 국읍을 형성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역 중심지가 삼국시대에 신라에 편입되면서 낙동강 방면 관문 거점인 달구벌로 발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삼국시대]

현재의 경주 지역에 있었던 사로국(斯盧國)은 주변 ‘국’을 복속하여 나가면서 고대국가 신라로 발전하였다. 경주에서 가까운 대구 지역도 일찍이 세력권 또는 영역으로 편입되었을 것이다. 대구 지역의 편입을 보여 주는 것이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타나는 달벌성(達伐城)의 축조와 성주(城主) 극종(克宗)의 파견 기사이다. 261년(첨해이사금 15)에 있었던 일로 기록되어 있으나,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고, 대체로 4세기 중엽 이후의 일로 간주되고 있다.

이 무렵 지역 중심지에 토성이 축조되거나 고총(高塚), 즉 거대한 봉분을 가진 무덤들이 출현하는데, 대구 지역에서는 달벌성으로 추정되는 달성토성이 축조되었고 인근에 달성 고분군이 조영되었다. 달성 고분군은 시내에 있어 많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전모를 알기는 어렵지만, 지금까지 조사된 것들은 5세기를 중심 연대로 하여 다소 늦은 편이다. 이 밖에 화원 지구에서 화원토성과 성산리 고분군, 해안 지구에서 봉무토성불로동 고분군의 조합을 확인할 수 있으며, 대명동 고분군, 칠곡 지구의 구암동 고분군, 하빈 지구의 죽곡리·문산리 고분군 등도 이 시기 대구 지역의 중요한 고총 고분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고총은 경주의 왕릉처럼 거대한 봉분을 하고 있으며, 내부에서 금동관이 출토되기도 하여 마치 독자적인 정치세력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기 쉽다. 그렇지만 출토 유물은 대부분 신라 토기와 신라식 장신구이며, 고분의 중심 연대가 5세기, 즉 마립간기(麻立干期)[356~500]에 해당한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연구자들은 이 시기에 신라가 지방을 간접 지배한 것으로 설명한다. 즉 지방관을 파견하여 직접 통치한 것이 아니라 재지(在地)의 유력자를 관리자로 하여 간접적으로 통치하였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토성과 고총 고분군이 조영된 곳은 신라가 주변 지역을 통제하고 영역을 확대하기 위한 거점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신라에게 있어 대구 지역은 낙동강 방면으로 진출하는 데 가장 중요한 관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달구벌에 해당하는 달성토성달성 고분군은 이 지역의 가장 우월한 유적으로서 중심적인 거점인 동시에 주변의 다른 거점들을 관할하는 역할도 담당하였을 것이다.

고분군이 축조된 지점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나오는 군현(郡縣) 소재지와 일치하여, 후대에 행정 중심지로 발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세기 말부터 신라는 지방관을 파견하여 영역을 직접 통치하기 시작하였는데, 기존의 거점들을 성(城)·촌(村)으로 편제하고 지방관인 도사(道使)를 파견하였으며, 일정한 지역을 단위로 군(郡)을 설정하여 여기에는 당주(幢主)를 두었다. 신라 중고기(中古期)[500~654]의 지방 제도는 이처럼 도사가 파견된 성·촌, 즉 행정성·촌 몇 개가 하나의 군을 이루고 있는 형태였다고 할 수 있는데, 행정성·촌은 다시 몇 개의 자연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신라 중고기 지방제도를 잘 보여주는 것이 중구 대안동에서 발견된 무술오작비(戊戌塢作碑)이다. 무술오작비는 무술년(578)에 둑[塢]을 쌓아 저수지를 만든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인데, 무술오작비에는 인근 지역으로 추정되는, 동원된 사람들이 소속된 촌명이 기재되어 있다. 무술오작비에 기재된 촌들은 후대에 군현이 되는, 대구 지역의 알려진 지명과 차이가 있어 달구벌[성·촌]에 소속된 자연촌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우리가 중고기 대구 지역의 행정 편제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자료는 없으며, 통일신라의 자료인 『삼국사기』 지리지를 통하여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대구 지역에는 수창군(壽昌郡)[이하 경덕왕 때 고친 이름을 기준으로 함, 현 수성구]이 설치되었고, 그것이 대구현(大丘縣)[현 대구 시내], 팔리현(八里縣)[현 북구 읍내동], 하빈현(河濱縣)[현 달성군 다사읍·하빈면], 화원현(花園縣)[현 달성군 화원읍]을 거느리고 있었다. 삼국시대에도 비슷한 형태의 군이 설정되어 있었을 것이며, 여기에 위화[수창의 본명], 달구화[대구의 본명], 팔거리[팔리의 본명], 다사지[하빈의 본명], 설화[화원의 본명] 등의 행정성·촌이 소속되어 있었을 것이다. 다만 군의 중심지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위화, 즉 윗벌이 아니라 달구벌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통일신라시대]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지방 제도를 정비하였는데, 가장 큰 변화는 기존의 행정성·촌을 현(縣)으로 개편하여 주(州)-군(郡)-현의 체계를 갖추었다는 것이다. 중국의 군현제에서는 군치(郡治)가 되는 중심 현이 존재하지만, 신라에서는 존재하지 않고 그냥 같은 군 이름으로 지칭되었을 뿐이다. 예컨대 수창군의 중심지는 그냥 ‘수창군’이라고 하였으며, 따라서 수창군이라고 하면 군 전체를 의미할 수도 있고 다른 현을 제외한 군의 중심 부분[이하 군치로 지칭]만을 의미할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군에는 군태수(郡太守)가, 현에는 현소수(縣少守) 혹은 현령(縣令)이 파견되었는데, 현소수와 현령은 취임 자격에 차이가 있었던 것 정도가 알려져 있다.

기존의 달구화군은 어느 시점에 위화군이 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군치의 변경은 대체로 달구벌 천도 시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신라가 달구벌로 천도하려고 하였던 이유 중 하나는 당(唐) 장안성(長安城)과 같은 격자형 계획도시를 조영하기 위해서였을 것이고, 대구 지역에서는 신천 좌우의 평지가 후보지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천도는 결국 이루어지지 못하였지만 그 결과 신천 동쪽의 평지, 즉 위화가 새로운 군치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수창군의 중심지는 현재의 수성초등학교 부근으로 추정된다. 수성초등학교 북쪽 인근의 우방아파트 부지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취락이 조사되었으며, 중동 356-7번지 일원에서는 통일신라시대 고급 기와가 사용된 건물 기단지가 확인되어 수창군 관아지로 추정된다. 즉 평지에 새로운 관아와 중심적인 취락이 조영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수창군치의 모습은 기존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통일신라 군치의 구체적인 형태로 주목된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위화군, 즉 수창군은 군치와 4개의 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편 현재 대구에 속한 해안현(解顏縣)[본명 치성화현(雉省火縣)]은 당시 장산군(獐山郡)[본명 압량군(押梁郡), 현 경상북도 경산시]에 속하였으며, 현풍 지구의 현효현(玄驍縣)[본명 추량화현(推良火縣)]은 화왕군(火王郡)[현 경상남도 창녕군]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리고 화왕군, 수창군, 장산군 등은 신라의 9개 광역 행정구역 중 하나인 양주(良州)[본명 삽량주(歃良州), 현 경상남도 양산시]를 구성하고 있었다.

통일신라의 왕경은 한반도의 동남쪽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서쪽의 대구를 경유하여야 대부분 지방에 도달할 수 있었다. 달구벌 천도가 추진되고 부악(父岳), 즉 팔공산이 국가 제사를 지내는 5악(岳) 중 ‘중악(中岳)’으로 인식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당시 신라의 가장 중요한 교통로는 당으로 가는 항구인 당은포(唐恩浦)와 한강 유역의 한주(漢州)[본명 한산주(漢山州), 현 경기도 하남시]에 이르는 길이었을 것인데, 이 길은 현재의 상주영천고속도로와 같이 대구를 경유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금호강에서 이어지는 낙동강 수운을 이용하려면 대구로 나와야 하였을 것이며, 구 백제 지역으로 갈 때도 대부분 대구를 경유하여야 했을 것이다.

원성왕[재위 785~798]의 자손들이 왕위를 이어 나갔던 하대(下代)에는 특별한 외침은 없었지만,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 지방을 근거로 한 반란이 몇 차례 발생하였다. 헌덕왕[재위 809~826] 때 웅천주(熊川州)[현 충청남도 공주시] 도독 김헌창은 아버지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는데, 반란을 진압한 군대는 대구 인근의 도동현(道冬峴)[현 경상북도 영천시 도동 부근]과 성산(星山)[현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에서 반란군과 싸워 승리하였다.

흥덕왕[재위 826~836] 사후의 왕위 계승 경쟁에서 패배한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이 청해진의 군대를 빌어 839년 민애왕을 공격하였을 때도 달벌에 이르러 양 진영의 군대가 전투를 벌이게 되었고, 여기에서 승리한 김우징이 신무왕으로 즉위하였다. 이처럼 통일신라에서도 대구 지역은 왕경에서 지방으로 나아가는 교통상의 요지이면서 방어상의 중요한 거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불교 문화]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불교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고 중국으로부터 새로운 사조가 도입되면서 원효(元曉)[617~686]와 같은 교학승이 나타나고 화엄종(華嚴宗)·법상종(法相宗) 같은 종파가 성립하였다. 원효는 대구 인근 경산 출신으로 불교 대중화에 앞장선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 이전에 많은 저술을 남긴 학승으로 동아시아 불교 사상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신라 화엄종은 중국 화엄종의 대종사인 지엄(智儼)[602~668]의 문하에서 수업하고 돌아온 의상(義相)[625~702]에 의하여 개창되었는데, 의상은 10곳의 절, 이른바 화엄 10찰을 세워 교를 전하게 하였다고 한다. 최치원이 지은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열거된 10찰 중에는 ‘중악 공산 미리사(美理寺)’가 포함되어 있다. 미리사공산전투신숭겸김락이 전사한 장소, 즉 현재 표충사가 있는 곳 인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법상종은 당나라 현장(玄奘)[602?~664]이 인도에서 가지고 온 신유식(新唯識)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때 신라 승려 원측(圓測)[613~696]이 현장을 도와 일정한 역할을 하였으며, 효소왕 때 도증(道證)이 귀국하여 신라에 신유식을 전하였고 제자 태현(太賢)이 발전시켰다. 경덕왕대 금산사를 중심으로 점찰법(占察法)을 전수한 진표(眞表) 또한 법상종 계통으로 알려져 있는데, 『삼국유사』 의해편 ‘심지계조(心地繼祖)’에는 헌덕왕의 아들 심지가 진표의 제자 영심(永深)으로부터 점찰 간자(簡子)와 법을 전수받아 팔공산 동화사에서 전하였다고 되어 있다.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에서 나온 사리합 명문에는 경문왕이 민애왕의 조업을 추숭하기 위하여 석탑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즉 동화사가 신라 왕실의 원찰로도 기능하음을 알 수 있다.

하대에 들어 중국에서 유행한 선종(禪宗)이 도입되었는데, 이때 지방에 정착한 선승들이 고려시대 9산 선문(九山禪門)의 시조가 되었다. 선승들이 정착한 곳은 왕경에서 비교적 먼 곳이었기 때문에 대구 지역에서 직접 관련된 곳을 찾기는 어렵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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