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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마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010
한자 同姓-
이칭/별칭 동성촌락(同姓村落),동족부락(同姓部落)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재두

[정의]

조선 후기 대구 지역에 형성된 성이 같은 사람이 모여 사는 마을.

[내용]

조선 후기 친족 질서는 내외친이 망라되는 양계적(兩系的) 친족 질서에서 적장자(嫡長子) 중심의 부계적(父系的) 친족 질서로 변화되었다. 구체적으로 혼인 형태에서 유교적 요소의 강화, 적장자 중심의 남녀 차등 상속, 장자 단독 봉사(奉祀), 부계 혈연을 중심으로 한 문중(門中)의 결성과 동성마을의 형성 등으로 나타났다. 특히 동성마을 혹은 동성촌락은 조선 후기 강화된 부계 혈연 중심의 문중이 사회적 지배력을 관철시킬 수 있는 주요한 기반이었다.

부계 혈연의 구심점이었던 동성마을은 부계적 질서가 강화될수록 증가하였으며, 조선 후기를 거치면서 보편적인 마을의 형태로 발달하였다. 한국에서 동성마을이 해체되기 시작한 것은 산업화와 도시화가 본격화하는 1960년대 이후의 일이었다.

동성마을에는 서원이나 서당 또는 누정과 재실이 있다. 이러한 건축물들은 가문의 조상을 선양하거나 가문의 위세를 과시하는 것으로, 내적으로는 혈연적인 결집을 도모하고 외적으로는 다른 성씨와 하층민에 대한 상대적인 우위와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물이었다. 동성마을은 혈연의 결집을 통하여 사회 경제적 또는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 조선총독부의 조사에 의하면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동성마을이 분포한 지역은 경상북도로 1,901곳이었으며, 그중 달성군이 113곳이었다. 산격동 달성서씨, 검단동 우계우씨와 순흥안씨, 무태[현 대구광역시 북구 동변동·서변동] 인천이씨, 지산동 중화양씨, 범어동 능성구씨, 황금동 일직손씨, 상인동 단양우씨, 미대동 인천채씨, 둔산동 경주최씨 마을 등이 대표적이었다.

특히 성북면[현 북구 일대]·공산면[현 동구 일대]·해안면[현 동구 일대]은 조선총독부 조사에서 34곳의 동성마을이 분포하였던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동성동본이 100호 이상인 대규모의 동성마을도 많았다. 『대구부 호적대장』의 기록을 토대로 이 지역의 동성마을의 형성 시기를 분석하여 보면, 지역 내 동성동본 집단의 거주가 시간이 경과할수록 동성마을로 집중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또한 지속적으로 거주하며 동성마을을 형성하였던 성관(姓貫)이 있었던 반면에 마을에서 사라지는 성관들도 발견되며, 한 마을에 2개 이상의 성관이 공존하면서 동성마을을 형성한 사례도 확인할 수 있다.

20세기 전반 무렵 대구 지역에 분포했던 동성마을 중 적지 않은 수가 19세기 후반 또는 20세기에 형성되었다. 18세기 후반 또는 19세기에 형성된 동성마을은 대부분 양반 마을이었으나 일부 평민 동성마을도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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