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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861
한자 李相定
영어공식명칭 Lee Sangjeong
이칭/별칭 이연호(李然晧),이연호(李然浩),이직(李直),청남(晴南),산은(汕隱)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장세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6년 6월 10일연표보기 - 이상정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12년 - 이상정 일본 고쿠가쿠인대학 재학
활동 시기/일시 1917년~1923년 - 이상정 대구 계성학교 등에서 교사로 근무
활동 시기/일시 1925년 1월 - 이상정 용진단 위원장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26년 - 이상정 중국 군벌 서북국민연합군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27년 - 이상정 중국 국민정부군 장성으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27년 - 이상정 동로항공사령부 특별문관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33년 - 이상정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37년 - 이상정 조선민족혁명당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39년 4월 - 이상정 청년호성사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40년 9월 - 이상정 한국광복군 창설 지원
활동 시기/일시 1942년 - 이상정 대한민국임시정부 외교연구위원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45년 2월 - 이상정 신한민주당 창당 주도
몰년 시기/일시 1947년 10월 27일연표보기 - 이상정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7년연표보기 - 이상정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출생지 서문로2가 - 대구광역시 중구 서문로2가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대구 - 대구광역시
거주|이주지 중국 - 중국
학교|수학지 고쿠가쿠인대학 - 일본 도쿄시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활동지 서울 - 서울특별시
활동지 중국 - 중국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용진단 위원장|대한민국 임시정부 외교연구위원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이상정(李相定)[1896~1947]은 1896년 6월 10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서문로 2가에서 태어났다. 대구에서 계성학교 교사와 용진단(勇進團) 위원장을 역임하였고, 1925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중국군 장성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연호(李然晧)·이연호(李然浩)·이직(李直)으로도 알려졌다.

[가계]

이상정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호는 청남(晴南)·산은(汕隱)이다. 아버지는 이시우(李時雨)이고, 어머니는 김신자(金愼子)이다. 부인은 권기옥(權基玉)이고, 동생은 이상화(李相和)·이상백(李相佰)·이상오(李相旿)이다.

[활동 사항]

이상정은 1900년대 초 큰아버지 이일우(李一雨)가 설립·운영한 우현서루(友弦書樓)에서 신구학문을 수학하였다. 이후 1912년 일본 도쿄[東京]로 유학하여 고쿠가쿠인대학[國學院大學]에서 공부하였다. 귀국 후 1917년부터 1923년까지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 평양 광성고등보통학교, 서울 경신학교(儆新學校),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와 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 등에서 교사로 근무하였다.

이상정은 1925년 1월 대구의 사회주의 계열 조직인 용진단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는데, 4월 서울에서 용진단 관계자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면서 수사망이 좁혀 오자 해외 망명을 결심하였다. 1925년 5월경 중국 만주의 하얼빈으로 망명한 후 교육 사업에 종사하면서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교유하였다. 1926년 중국 북부와 서북 지방에서 활동하던 중국 군벌 펑위샹[馮玉祥]의 서북국민연합군(西北國民聯合軍)에서 장성급 참모로 활약하였다. 1927년 서북국민연합군이 장제스[蔣介石]의 중국 국민당 부대로 통합되자, 이상정은 국민정부군[국민혁명군 제2집단군] 소장(少將)으로 근무하며 한·중 연대 및 항일투쟁을 지원하였다. 이때 항공대에서 근무하던 한인 최초의 여류비행사 권기옥을 만나 1926년 10월에 결혼하였다. 1927년 권기옥이 상하이 동로(東路)항공사령부의 비행사가 되자 함께 상하이로 이주하여 항공사령부 특별문관으로 활동하였다.

이상정은 1933년 말에서 1934년 초 항저우[杭州]로 이전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경상도 의원으로 두 차례 선출되었으나,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1937년 중국 난징[南京]에서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 등 좌파 계열 민족운동 단체들의 통합에 앞장섰다. 1938년에는 중국 국민정부군의 육군참모학교 교관으로 활동하며 중국의 항일전쟁을 지원하였다.

이상정은 1939년 4월 한인 청년들의 독립사상 및 독립운동을 고취하기 위하여 충칭[重慶]에서 청년호성사(靑年呼聲社)를 조직하였고, 조선민족혁명당 출신의 이건우(李健宇)와 함께 잡지 『청년호성(靑年呼聲)』을 창간하였다. 10월에 임시의정원 경상도 지역 의원으로 다시 선출되었고, 1940년 9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한국광복군 창설을 적극 지원하였다. 1942년 제3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최동오(崔東旿) 등 27명과 함께 연서로 “우리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최단 기간 내에 중·미·영·소 등 연합 각국 정부에 향하여 정식으로 우리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을 요구할 것”이라는 내용의 ‘임시정부 승인에 관한 건’을 대표 제안하였다.

1942년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외무부 내에 외교연구위원회를 설치하고 외교 전반에 관한 문제를 연구하게 하였는데, 이상정은 신익희(申翼熙)·장건상(張建相) 등과 함께 외교연구위원으로 선임되어 임무를 수행하였다. 의정원 의원 시절에는 한국광복군의 자주적 행동을 제한하고 있는 ‘한국광복군 9개 행동 준승(準繩)’의 취소를 여러 차례 강조하고, 중국과 평등조약을 체결하자고 주장하였다. 1945년 2월에는 홍진(洪震)·유동열(柳東說)·김붕준(金朋濬) 등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야당이라 할 수 있는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 창당을 주도하고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이상정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한 이래 개조와 통합을 통한 독립운동 노선의 변화를 추구하였다. 또한 1942년부터 1945년 8월 광복 때까지 충칭에서 중국 육군 유격대훈련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군사인재 양성에 노력하였다. 이후 중국군 중장(中將)으로 진급하였다. 광복 후에는 중국 북부 지역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도왔고, 1946년 1월 상하이로 가서 한인들의 권익 보호와 국내 귀환에도 적극 노력하였다. 이상정은 1947년 10월 27일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이상정의 저술로는 『산은유고(汕隱遺稿)』가 있고, 육필 원고 『표박기(飄迫記)』가 1950년 청구출판사에서 『중국유기(中國遊記)』로 출판되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이상정의 공적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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