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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3029
한자 崔小福
영어공식명칭 Choi Sobok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11년 7월 4일연표보기 - 최소복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30년 - 최소복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퇴학
활동 시기/일시 1932년 1월 - 최소복 적색농민조합건설준비협의회 결성
수학 시기/일시 1932년 5월 - 최소복 서울 경성고등예비학교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33년 - 최소복 서울에서 동맹휴교 지도
활동 시기/일시 1937년 4월 - 최소복 서울에서 광고미술사 개업
출생지 봉산동 - 대구광역시 중구 봉산동 지도보기
학교|수학지 대구고등보통학교 - 대구 봉산동 지도보기
활동지 왜관 -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활동지 서울 - 서울특별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이재유그룹 상부트로이카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최소복(崔小福)[1911~?]은 1911년 7월 4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봉산동에서 태어났다.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에서 퇴학당한 뒤 서울로 유학하여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활동 사항]

최소복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30년 단식투쟁 사건으로 퇴학당하였고, 1931년 12월 초순 대구격문사건이 빌미가 되어 경상북도 왜관에서 대구경찰서 고등계 형사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최소복은 1932년 1월 왜관에서 이계석(李季錫)·진병기(陳秉基)·정칠성(鄭七星) 등과 함께 코민테른 「12월 테제」 및 프로핀테른 「9월 테제」에 기초하여 적색농민운동의 전위조직으로 적색농민조합건설준비협의회를 결성하였다.

최소복은 1932년 5월 상경하여 경성고등예비학교에 입학하였고, 1933년 졸업한 후 경성전기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즈음 최소복은 이현상(李鉉相)과 함께 학생 계층을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이재유(李載裕)그룹’에 참여하여 상부 트로이카에 배속되었다. 이때 이계석·정칠성 등도 상경하여 이재유그룹에 합류하였다.

최소복은 1933년 5월부터 6월까지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와 조선중앙기독교청년학교의 동맹휴교를 지도하고, 9월부터 12월 무렵까지 「학생운동의 행동강령서」를 작성하였다. 11월경에는 중앙고등보통학교, 배재고등보통학교 동맹휴교를 선동하고 반제동맹 결성에 참여하였다. 최소복은 1934년 1월 27일 경기도 경찰부에 검거되었고, 1935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형을 언도받아 12월 20일 서대문형무소를 출소하였다.

최소복은 1937년 4월 서울에서 광고미술사를 개업하여 생활 방편을 강구하는 동시에 프로연극운동의 부흥을 모색하였다. 4월에는 이정업 등과 제휴하여 공산주의협의회 결성에 참여하여 총책임 및 노동부를 맡았으며, 6월부터 왜관에서 독서회를 개최하여 농민운동 방침과 반전·반제운동 방침을 토의하였다. 최소복은 러시아로 망명하기 위하여 여비를 마련하던 중 일제 경찰에게 러시아행이 좌절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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