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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서낙재행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6548
한자 答徐樂齋行甫
영어공식명칭 A reply to a letter from Seo Sa-won
이칭/별칭 서낙재 행보에게 답하다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호로 250-11[황금동 79-4]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곽명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553년 - 손처눌 출생
저자 몰년 시기/일시 1634년 - 손처눌 사망
편찬|간행 시기/일시 1784년 - 『모당집』 간행
배경 지역 청호서원 -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호로 250-11[황금동 산79-4]지도보기
성격 서간류|서
작가 손처눌

[정의]

대구의 청호서원에 제향된 손처눌이 조선 후기 문인 서사원의 편지에 쓴 답장.

[개설]

「답서낙재행보(答徐樂齋行甫)」를 쓴 손처눌(孫處訥)[1553~1634]은 본관이 일직(一直)이며, 자는 기도(幾道)이고, 호는 모당(慕堂)이다. 아버지는 손수(孫遂)이고,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 이탄(李坦)의 딸이다. 정구(鄭逑)[1543~1620]의 문인이다. 장현광(張顯光), 서사원(徐思遠), 곽재겸(郭再謙), 유요신(柳堯臣) 등과 교유하였다. 학문과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대구 지역 인사들과 공산의진군(公山義陣軍)을 조직하여 왜적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서사원과 함께 대구 지역의 강학 활동에 힘써 대구 문풍(文風)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연경서원, 선사재 등에서 강학하였다.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 청호서원(靑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1784년 간행된 『모당집(慕堂集)』이 있다.

서사원[1550~1615]은 본관이 달성(達城)이고, 자는 행보(行甫)이며, 호는 낙재(樂齋) 혹은 미락재(彌樂齋)이다. 경상북도 성주 팔거현(八莒縣)[현 대구광역시 북구 칠곡 일대]에서 출생하였다. 서사원의 본가는 대구 남산(南山)의 옛 역터이다. 서사원은 임진왜란기를 중심으로 영남에서 구국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열악한 환경에서 학문 연마와 강학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황(李滉)의 학맥을 계승한 정구를 찾아가 배웠고, 정구서사원을 사우(師友)로 대우하였다. 장현광, 곽재겸, 손처눌 등과 교유하였다. 서사원의 위패는 청주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봉안되었고, 2008년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 구암서원(龜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낙재집(樂齋集)』, 『낙재선생문집』이 있다.

「답서낙재행보」서사원이 보낸 편지에 손처눌이 쓴 답장으로 ‘서낙재 행보에게 답하다’라는 의미이다.

[구성]

「답서낙재행보」손처눌이 안부를 묻는 내용과 함께 서사원이 보낸 편지에서 언급한 것에 대한 답변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

「답서낙재행보」의 내용을 단락별로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보내 준 편지에 가르침을 담아 준 것에 대한 감사함을 전달함.

둘째, 서사원이 장현광에 비긴다는 자신의 칭찬이 당연함을 설명함.

셋째, 지난 편지에서 공규(孔珪)의 「북산이문(北山移文)」 숙독(熟讀)을 당부한 말에 서사원의 오해가 있어 원래 의도를 설명함.

넷째, 초봄에 만났을 때 건넨 조언과 충고로 서운함이 있었는지에 대한 서사원의 물음에 손처눌은 단지 반성하고 더욱 경계하기 위하여 거듭 말한 것일 뿐이었다고 답함.

다섯째, 지난번 보낸 편지와 함께 남긴 시 한 수의 앞 구절 일부가 수정된 것임을 밝히고, 과정과 이유를 설명하고 어느 것이 더 좋은지 물어봄.

여섯째, 주변의 말들을 의심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찬미와 증오를 넘치게 하는 서사원의 순수한 성정을 걱정함.

일곱째, 지치고 병들어 은거를 하려 하였는데 뜻하지 않게 분수에 맡지 않는 향교의 직을 맡게 된 것을 구제하여 주길 요청함.

여덟째, 여러 안부를 물으며 마무리함.

[특징]

『모당집』에는 손처눌의 답장인 「답서낙재행보」에 이어, 서사원이 먼저 보낸 「부낙재서(附樂齋書)」 편지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답서낙재행보」서사원의 편지를 통하여 당대 대구 지역 선비들의 교류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손처눌서사원은 매우 가까운 사이였지만 선비로서의 언행에 있어서는 질정(質正)을 엄정히 하고, 서로 바른 도(道)로써 권면하여 주기를 철저히 하였다. 손처눌서사원임진왜란 후 대구 문풍을 진작시키는 데 앞장섰기 때문에 선비로서 서로의 처신과 행동거지를 엄중히 단속할 수밖에 없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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