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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80934
한자 朴海齡
영어공식명칭 Park Haeryeong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57년연표보기 - 박해령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7년 - 박해령 대동 광문회 회장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07년 - 박해령 금연 상채회 출범에 동참
활동 시기/일시 1908년 - 박해령 대한 협회 대구 지회 회장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08년 7월 - 박해령 칠곡 군수 부임
활동 시기/일시 1910년 10월 - 박해령 상주 군수 부임
활동 시기/일시 1912년 8월 - 박해령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 병합 기념장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14년 9월 - 박해령 성주 군수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15년 8월 - 박해령 경상북도 지방 토지 조사 위원회 임시 위원으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15년 10월 2일 - 일본 적십자사 제2회 총회 및 애국 부인회 조선 본부 제3회 총회에서 유공장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15년 11월 - 일본 정부로부터 다이쇼 대례 기념장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19년 12월 - 박해령 조선 총독부 중추원 부찬의로 임명
몰년 시기/일시 1920년 3월연표보기 - 박해령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20년 3월 - 박해령 중추원 찬의 추서
출생지 박해령 출생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거주|이주지 박해령 거주지 - 대구광역시
활동지 박해령 활동지 - 대구광역시
묘소 박해령 묘소 -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성격 관료
성별
대표 경력 대동 광문회 회장|대한 협회 대구 지회 회장|칠곡 군수|상주 군수|성주 군수|조선 총독부 중추원 부찬의

[정의]

개항기와 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계몽 운동가·관료.

[활동 사항]

박해령(朴海齡)[1857∼1920]은 경상북도 달성군 하빈면에서 태어났다. 1907년 2월 대구 광문사(大邱廣文社)[달성 광문사] 문회가 학교 설립을 통한 교육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가기 위해 명칭을 대동 광문회(大東廣文會)로 바꿀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자리에서 국채 보상 운동이 시작되었다. 대동 광문회 회장을 비롯한 대구 광문사 사장 김광제(金光濟), 부사장 서상돈(徐相敦) 등 회원 13명이 발기인이 되어 금연 상채회를 출범시켰다. 그들은 「국채 담보 취지서」를 작성하여 전국에 배포하였다. 이처럼 국채 보상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08년 1월 3일 조병희(趙秉禧)·이교섭(李敎燮)·이석진(李錫珍)·서봉기(徐鳳綺)·서흥균(徐興均) 등과 함께 대구의 서문 밖 김우근(金愚根)의 집에서 대한 협회 대구 지회 설립에 관한 윤함을 공포하였다. 그해 1월 25일 달본 소학교(達本小學校)에서 열린 대한 협회 대구 지회 발기인 대회에 이어 설립된 대한 협회 대구 지회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대한 협회 대구 지회 회장으로 계몽 운동을 전개하던 중 1908년 7월 칠곡 군수로 임명되었고, 한 일 병합 체결 뒤인 1910년 10월 조선 총독부에 의해 경상북도 상주 군수로 임명되었다.

1912년 8월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 병합 기념장을 받았다. 1914년 9월 경상북도 성주 군수로 임명되었고, 1915년 8월 경상북도 지방 토지 조사 위원회 임시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15년 8월 본인을 비롯한 경상북도의 유지들과 함께 문화의 발전과 산업을 도모한다는 명목 아래 경상북도 사업단을 발기하였다. 1915년 10월 2일 창덕궁 비원에서 열린 일본 적십자사 제2회 총회 및 애국 부인회 조선 본부 제3회 총회에서 유공장[공로장]을 받았고, 11월 일본 정부로부터 다이쇼[大正] 대례 기념장을 받았다. 1919년 12월 조선 총독부의 자문 기구인 중추원의 부찬의로 임명되었다가 다음해 3월 사망하였다.

[묘소]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의 세용산에 묘소가 위치해 있다.

[상훈과 추모]

1919년 3월 사망과 동시에 중추원 찬의로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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