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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종 초상」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437
한자 丁若鍾肖像
영어공식명칭 Portrait of Jeong Yak-jong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물/서화류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한세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작 시기/일시 1760년 이후 - 「정약종 초상」 제작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45년 이후 - 「정약종 초상」 매산 김양선 박사가 정씨 가문에서 구입
현 소장처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로 369[상도동 511]지도보기
성격 초상화
작가 이희영(李喜英)
서체/기법 초상
소유자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관리자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천주교 순교자 정약종의 초상화.

[개설]

「정약종 초상」은 천주교 신자인 이희영(李喜英)[1756~1801)이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형이자,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순교한 정약종(丁若鍾)[1760~1801]을 그린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정약종은 천주교 교리서인 『주교요지』를 저술하여, 초기 천주교 정착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작품 상단에는 근대기 서화 수장가인 송은(松隱) 이병직(李秉稙)[1896~1973]이 적은 관지가 있는데, 매산 김양선 박사가 해방 직후에 정약용 문중에서 보관하던 것을 구입했다고 기록했다.

[형태 및 구성]

「정약종 초상」은 종이에 담채로 그렸으며, 크기는 세로 61.5㎝, 가로 29.0㎝이다.

[특징]

「정약종 초상」에는 정약종으로 보이는 한 남성이 머리에는 사방관(四方冠)을 쓰고 야복(野服)을 입고, 손에는 책을 들고 나무 아래 뜰을 거닐고 있다. 얼굴은 맑은 피부에 짙은 눈썹과 대상을 강하게 응시하는 눈빛, 굳게 다문 입술로 그려 주인공의 성격을 대변하고 있다. 나무를 배경으로 한 인물의 전신 초상은 중국 명청(明淸) 시기에 유행한 화풍으로, 오동나무 아래 책을 읽는 고아한 선비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의의와 평가]

「정약종 초상」은 유학자이자 천주교 교리서인 『주교요지』를 집필한 정약종을 그린 초상화로, 18세기 천주교인의 초상화로 유일하다.

정약종은 세례명 아우구스티노(Augustine)로 유학자였던 그가 처음 천주교를 접하게 된 계기는 처음으로 조선에 천주교회를 만들었던 형제와 관련되어 있다. 1784년 4월 동생인 정약용이 이벽(李檗)[1754~1785]에게 천주교 교리를 듣고 신앙으로 접하게 된 이후에 중형(仲兄)인 정약전(丁若銓)[1758~1816]이 최초로 영세를 받았던 이승훈(李承薰)[1756~1801], 권일신(權日身)[1742~1791], 이벽과 함께 조선 천주교회를 설립하였다. 이에 정약종 역시 영향을 받아 1786년 3월 이후에 천주교를 인식하게 되고, 이후에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권일신을 대부로 삼아 입교하였다.

정약종은 교리서 연구에 매진하였으며, 이후 교회의 중요한 지도층 인사로 활약하였다. 1791년 발생한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초기 천주교회의 중심인물이었던 정약용과 이승훈 등이 천주교와 거리를 두게 되었지만, 오히려 정약종은 천주교의 전교에 매진하면서 주요 지도층으로 활동했다. 1795년 조선에 잠입한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1752~1801]의 활동을 지원하였고, 최초의 평신자 단체로 교리를 가르치는 명도회(明道會)의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배교(背敎)하지 않고 순교자로서 일생을 마감했던 신자로서 정약종의 행적은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에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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