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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587
한자 金昌集
이칭/별칭 여성(汝成),몽와(夢窩),충헌(忠獻)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선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48년연표보기 - 김창집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73년 - 김창집 진사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84년 - 김창집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89년 - 김창집 사직
활동 시기/일시 1717년 - 김창집 영의정 제수
몰년 시기/일시 1722년연표보기 - 김창집 사망
추모 시기/일시 1725년 - 김창집 관작 복원
묘소|단소 영의정 김창집 묘 -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초현리 산12-15
사당|배향지 반곡서원(盤谷書院) - 경상남도 거제시 거제면 동상3길 31-8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안동
대표 관직 영의정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지역에 있었던 사충사에 배향된 조선 후기 문신.

[가계]

김창집(金昌集)[1648~1722]의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여성(汝成), 호는 몽와(夢窩)이다.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좌의정 김상헌(金尙憲)의 증손이고,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김광찬(金光燦)이다. 아버지는 영의정 김수항(金壽恒), 어머니는 호조좌랑 나성두(羅星斗)의 딸이다. 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김창업(金昌業)의 형이다.

[활동 사항]

김창집은 1673년(현종 14)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좌의정에 있던 아버지 김수항이 예송의 소용돌이에서 남인의 배척을 받아 1674년 숙종 즉위 후에 영암에 유배되었다가 1678년 철원으로 이배되었다. 김창집이 문과에 응시한 것은 1684년(숙종 10)으로, 당시 공조좌랑으로서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정언(正言)·병조참의 등을 역임하다가 1689년에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진도 유배지에서 사사되어 사직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 때에 다시 관직에 복위되어, 병조참의를 제수받았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에도 동부승지·참의·대사간 등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사양하였다.

이후 철원부사로 다시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강화유수·예조참판·개성유수 등을 역임하고, 호조·이조·형조의 판서직을 맡았다. 1705년(숙종 31)에 지돈녕부사를 거쳐 이듬해 한성부판윤·우의정, 이어서 좌의정에까지 이르고, 1717년 영의정에 올랐다. 노론으로서 숙종 말년 세자의 대리청정을 주장하다가 소론의 탄핵을 받았다.

경종이 즉위하였지만 34세가 되도록 후손이 없자 노론과 소론 간에 후계자 선정문제로 대립하며 격화되었다. 노론은 당시 김창집을 비롯하여 노론 4대신을 중심으로 왕세제 책봉을 추진하였다. 마침내 인원왕후(仁元王后)의 후원을 받아 후에 영조가 되는 연잉군(延切君)은 세제(世弟)가 되었다. 세제 책봉 후, 1721년(경종 1))에는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노론에서 상소하였다. 경종은 처음에는 대리청정을 윤허하였지만 소론의 강력한 반대로 결국 실패하였다. 뿐만 아니라 몇 달 뒤 소론의 탄핵으로 노론이 축출되었고, 연이어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 등이 주축이 되어 노론의 행동이 반역이라 규정하여 정치적 공세를 펴서 신임사화가 일어났다. 소론의 주된 공격 대상은 노론 4대신인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 등이다. 노론 4대신은 신임사화로 인해 모두 유배당하였다가 사사되었다. 김창집은 같은 해 12월에 거제로 유배되었다가 다음해 5월에 사사되었다.

[학문과 저술]

김창집의 저술로는 『국조자경편(國朝自警編)』과 『몽와집(夢窩集)』 등이 있다.

[묘소]

김창집의 묘는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초현리 산12-15에 위치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영조는 1725년에 4대신의 관작을 복구시키고 노량(露梁)에 사충사(四忠祠)를 건립하여 이들을 배향토록 하였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현륭원으로 가는 길에 노량을 지날 때 승지를 보내 사충사에 치제(致祭)하였다. 당시 치제문에는 사충사의 모습이 매우 크고 그 곁으로 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고 묘사되어 있다. 또한 사충사의 상량문(上樑文)을 보면 사육신묘와 매우 가까운 거리에 사충사가 세워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영조 때 과천에 사충서원(四忠書院)을 세워 이이명·조태채·이건명과 함께 배향했으며, 거제의 반곡서원(盤谷書院)에도 제향되었다. 그리고 영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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