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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610
한자 鄭麟趾
영어공식명칭 Jeong Inji
이칭/별칭 백저(伯雎),학역재(學易齋),문성(文成)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우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396년연표보기 - 정인지 출생
활동 시기/일시 1411년 - 정인지 생원시(生員試) 급제
활동 시기/일시 1414년 - 정인지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415년 - 정인지 예문관 부교리(副校理)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18년 - 정인지 병조좌랑(兵曹佐郞)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21년 - 정인지 병조정랑(兵曹正郞)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24년 - 정인지 예문관 응교(應敎)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27년 - 정인지 중시문과(重試文科)에 장원 급제, 직제학(直提學)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30년 - 정인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봉작
활동 시기/일시 1433년 - 정인지 예문관 제학(提學)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35년 - 정인지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39년 - 정인지 집현전 제학(提學)에 이어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45년 - 정인지 우참찬(右參贊)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49년 - 정인지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50년 - 정인지 좌참찬(左參贊)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52년 - 정인지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53년 - 정인지 좌의정(左議政)에 제수. 정난공신(靖難功臣) 2등 책록,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에 봉작
몰년 시기/일시 1478년연표보기 - 정인지 사망
출생지 출생지 - 서울특별시
부임|활동지 충청감영(忠淸監營) - 충청북도 충주시
묘소|단소 정인지묘(鄭麟趾墓) -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성격 문신
성별
본관 하동
대표 관직 좌의정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지역의 효사정에 관한 시를 남긴 조선 전기 문신.

[개설]

정인지(鄭麟趾)[1396~1478]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한글의 창제 과정에 관여하였으며, 영의정 노한(盧閈)노량 나루터 부근에 복상(服喪) 후 축조한 효사정(孝思亭)에 관한 시문을 남겼다.

[가계]

정인지의 본관은 하동(河東)이며, 자는 백저(伯雎), 호는 학역재(學易齋),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증조부인 정익(鄭翊)과 조부 정을귀(鄭乙貴)의 관직은 확인되지 않는다. 아버지는 석성현감(石城縣監) 증영의정부사(贈領議政府事) 정흥인(鄭興仁)이며, 어머니는 흥덕 진씨(興德陳氏)로 중랑장(中郎將) 진천의(陳千義)의 딸이다.

[활동 사항]

태종이 직접 주재한 1414년(태종 14)의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세종 대 집현전학사로 『훈민정음(訓民正音)』과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등의 창제에 참여하였다.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한강변 남쪽 언덕에는 세종 대 우의정에 오른 노한이 세운 효사정이란 정자가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10권의 경기 금천현(衿川縣)[현재의 동작구]에 정인지효사정에 대해 읊은 시구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사정(思亭)이 높이 큰 강 위에 임했는데[思亭高杭大江頭], 효성스러운 아들 착한 손자 갖추어 아름답네[孝子慈孫自匹休]. 세덕(世德)은 이미 산같이 무겁고[世德已知山共重], 가성(家聲)은 길이 물과 함께 흐르네[家聲長與水同流]. 봄바람이 살랑거리는데 개오동나무 늙었고[春風搖漾松楸老], 가을날이 쌀쌀하니 골짜기가 그윽하다[秋日凄淸洞壑谷]. 굽어 보고 쳐다보는 정회를 누가 알아 주리[俯仰情懷誰識得]. 때때로 북궐(北闕)을 보니 서기(瑞氣) 띤 연기가 떴네[時看北門關瑞煙浮].”

노한이 모친을 위해 3년간 시묘(侍墓)한 부근에 세운 효사정정인지의 이 시문과 강희맹(姜希孟)의 「효사정기(孝思亭記)」 등을 통해 조선 시대 효도의 상징물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학문과 저술]

『훈민정음』과 『용비어천가』 등 한글 창제 및 관련 서적 편찬, 한글의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1431년(세종 13) 조선 고유의 역(曆)인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442년(세종 24)에는 『사륜오집(絲綸要集)』, 1445년(세종 27)에는 『치평요람(治平要覽)』의 찬수(纂修)에 관여하였다. 사서(史書) 분야에서는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태조실록(太祖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의 편찬, 개찬, 증수(增修) 및 감수에 참여하였다. 개인 문집으로는 『학역재집(學易齋集)』이 있다.

[묘소]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에 묘소가 있으며 묘비에는 강희맹의 글자를 새겼다. 충청북도 기념물 제33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1453년(단종 1) 정난공신(靖難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며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에 봉작되었다. 1466년(세조 12)에는 하동군(河東君)으로 작위가 개칭되었다. 1478년(성종 9) 사망 후 문성(文成)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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