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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631
한자 金完奎
영어공식명칭 Kim Wan-gyu
이칭/별칭 송암(松巖),송석(松石),법암(法菴)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조은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6년 7월 9일연표보기 - 김완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97년 - 김완규 한성전보사 주사 임용
활동 시기/일시 1910년 8월 - 『천도교회월보』 발행인 부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김완규 3·1운동에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21년 11월 - 김완규 출옥
활동 시기/일시 1945년 - 김완규 민생협회 회장
활동 시기/일시 1946년 12월 - 김완규 천도교 종무위원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47년 10월 - 김완규 천도교 도령 역임
몰년 시기/일시 1950년 12월 25일연표보기 - 김완규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2년연표보기 - 김완규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66년 - 김완규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 안장
출생지 김완규 출생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지동 107번지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민족대표 33인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독립운동가.

[개설]

김완규(金完奎)[1876~1950]는 1919년 민족대표 33인에 가담하여 3·1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자 천도교인이다.

[활동 사항]

김완규는 1876년 7월 9일 서울 연지동(蓮池洞) 107번지에서 태어났다. 1897년 11월 한성전보사(漢城電報司) 주사에 임용되었다. 1906년 2월 천도교에 입교해 원직(原職)인 중정(中正)과 주직(住職)인 중앙총부 서응관(庶應觀) 교섭원을 맡았고, 1907년 9월 금융관(金融觀) 교섭원, 1909년 2월 총인원(叢仁院) 의사원(議事員), 1910년 8월 『천도교회월보(天道敎會月報)』 발행인으로 활동했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강제 병탄하자 9월 주간 이교홍(李敎鴻) 등 천도교회월보사 사원 3명과 각국 영사에 편지를 보내 일제 통치의 부당함을 호소하다가 일경에 붙잡힌 후 풀려났다.

1919년 2월 26일 권동진 집에서 오세창 등 천도교 중진들을 만나 독립선언에 대한 계획을 듣고 동의했으며, 2월 27일 3월 1일 오후 2시 독립선언식 거행에 동의하고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했다. 3월 1일 오후 2시경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29명 중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식을 마친 후 자진 체포되어 경무총감부(警務總監部)에 구금되었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제7조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경성감옥으로 이감 후 1921년 11월 만기 출옥했다.

1922년 2월 손병희로부터 ‘법암(法菴)’이라는 천도교 도호를 받았고 4월에는 천도교중앙총부 서무과 주임에 임명되었다. 1945년 해방 후 민생협회(民生協會)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재정부장과 한성지부 지부장, 특별구제회(特別救濟會) 명예회장, 민족대표 33인 유가족회 회장 등을 맡았다. 1946년 12월 천도교 종무위원, 1947년 10월 천도교 도령을 역임했고 1950년 12월 25일 사망했다.

[묘소]

1966년 5월 18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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