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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652
한자 吳東振
이칭/별칭 송암(松菴),순천(順天)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황민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9년 8월 15일연표보기 - 오동진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13년 - 오동진 대성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 오동진 3·1운동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6월 - 오동진 광제청년단 조직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11월 - 오동진 대한청년단연합회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20년 7월 - 오동진 광복군총영 총영장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22년 1월 - 오동진 통군부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22년 8월 - 오동진 대한통의부 군사위원장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24년 7월 2일 - 오동진 대한통의부 사령장 겸직
활동 시기/일시 1924년 11월 - 오동진 정의부 사령장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25년 10월 10일 - 오동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26년 4월 5일 - 오동진 고려혁명당 결성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27년 12월 16일 - 오동진 체포
몰년 시기/일시 1944년 5월 20일연표보기 - 오동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2년연표보기 - 오동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75년 8월 13일 - 오동진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제단에 위패 봉안
출생지 오동진 출생지 - 평안북도 의주군 광평면 청수동 659
거주|이주지 오동진 이주지 - 중국 관전현 안자구
학교|수학지 일신학교 - 평안북도 의주시
학교|수학지 대성학교 - 평양특별시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제단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봉안된 독립운동가.

[개설]

오동진(吳東振)[1889~1944]은 3·1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광제청년단, 대한청년단연합회, 광복군총영과 대한통의부 및 정의부와 고려혁명당 등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가계]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아호(雅號)는 송암(松菴), 별호는 순천(順天)이다.

[활동 사항]

오동진은 1889년 8월 15일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광평면(廣平面) 청수동(靑水洞) 659번지에서 출생하였으며, 생후 반년 만에 생모 한씨(韓氏)가 죽고 12세 때 후모 백씨(白氏)를 만났으며, 계모의 정성어린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의주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졸업하였으며, 평양 대성학교(大成學校) 사범과에 입학하여 1913년에 졸업하였다.

1919년 3월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체포령이 떨어지자 3월 18일 중국 관전현(寬甸縣) 안자구(安子溝)로 망명하였다. 1919년 6월에는 윤하진(尹河振), 장덕진(張德震), 박태열(朴泰烈) 등과 함께 광제청년단을 조직하였으며, 11월에는 안병찬(安秉瓚)과 함께 청년단체를 통합하여 대한청년단연합회를 결성하였다.

1919년 10월 26일 김응식(金應植)과 함께 삭주(朔州), 벽동(碧潼), 창성(昌城), 위원(渭原), 강변(江邊) 8군을 중심으로 약 40일간 임시정부를 홍보하고 독립군을 모집하였다. 1920년 5월 하순에는 직접 상해(上海)로 가 포탄과 권총 등의 무기를 구해 운반해 오기도 하였다. 6월에는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이탁을 중심으로 광복군총영이 조직되자 총영장에 선임되었다. 1920년 7월 광복군총영은 결사대원을 평양, 신의주, 선천, 서울로 파견하여 8월에 미국의회 시찰단이 국내에 들어오는 것을 기회로 중요 지역에서 일제 관청을 파괴하고 요인들을 암살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1월에 결성된 통군부(統軍府)에 참여하였으며, 그 해 8월 통군부가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로 확대되자 군사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24년 11월 정의부(正義府)가 조직되자 사령장에 임명되었으며, 1925년 10월 10일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임되기도 하였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927년 12월 16일 길장선 흥도진역(吉長線興陶鎭驛)에서 일제 밀정 신의주경찰서 형사 김덕기에게 체포되었다. 1928년 4월에는 정의부 10중대원 김여연(金汝連), 최봉복(崔鳳福) 등이 오동진을 구출하기 위하여 입국하다가 신의주에서 체포되기도 하였다. 상고를 포기하고 무기징역형이 확정되어 경성감옥에 수감되었으며, 1934년 7월 19일에는 20년으로 감형되기도 하였다. 1944년 공주형무소로 이감되었다가 그해 5월 20일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묘소]

1975년 8월 13일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제단에 오동진의 위패가 봉안되었다.

[상훈과 추모]

정부에서는 오동진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하여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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