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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681
한자 柳一韓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상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4년 12월 13일연표보기 - 유일한 출생
몰년 시기/일시 1971년 3월 11일연표보기 - 유일한 사망
출생지 유일한 출생지 - 평양
학교|수학지 미시간주립대학교 - 426 Auditorium RoadEast Lansing, MI 48824
학교|수학지 서던캘리포니아대학원 - 90007 California, Los Angeles
학교|수학지 스탠포드대학원 - 450 Serra Mall, Stanford, CA 94305
활동지 유한양행 -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로 74[대방동 49-6]지도보기
성격 기업가|독립운동가
성별
본관 진주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에 있는 유한양행을 설립한 기업가이자 독립운동가.

[가계]

유일한(柳一韓)[1894~1971]은 아버지 유기연(柳基淵)과 어머니 김확실(金確實)[개명 후 김기복] 사이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일한의 부친은 일찍이 개화한 인물로 유일한이 태어날 당시 싱거[Singer] 미싱의 대리점을 경영하고 있었다. 남매는 유중한(柳仲韓)·유선한(柳善韓)·유명한(柳明韓)·유신한(柳信韓)·유동한(柳東韓)·유순한(柳順韓)·유특한(柳特韓) 등으로, 이 가운데 유명한과 유특한은 각각 유한양행의 2, 4대 사장을 역임하였다.

[활동 사항]

평양에서 출생한 유일한은 박용만(朴容萬)의 숙부 박장현(朴章鉉)이 평안도 선천(宣川)에 설립한 사립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05년 2월 박장현과 박용만이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미국행을 결심하자, 이들의 제자였던 정양필(鄭良弼) 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1919년 미시건주립대학[Michigan State University]에 재학중이었던 유일한은 같은 해 4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 독립운동 후원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선전을 목적으로 필라델피아에서 개최한 ‘한인자유대회’에 재미한국인 대표로 참가하게 된다. 유일한은 기초작성위원회 대의원으로 선출되어 「한국국민의 목적과 열망을 석명(釋明)하는 결의문」을 작성·낭독하여 한국의 독립을 세계 열강에 호소하였다. 이후 유일한은 1926년 귀국하여 서울 종로에서 유한양행(柳韓洋行)을 창립하고 초대 사장에 취임하여 의약품·위생·화장품·농기구·염료 등 사업을 다각화 하여 큰 성공을 거두어 나갔다.

그리고 1938년 다시 도미하여 사업 활성에 전력하는 한편, 독립운동에도 힘쓰고자 하였다. 유일한은 1941년 로스엔젤레스에 설치된 재미한족연합회 집행부 위원으로 선출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후원과 외교 및 선전사업을 추진하고, 일명 맹호군(猛虎軍) 또는 한인경위대(韓人警衛隊)로 불리기도 했던 한인국방경위대(韓人國防警衛隊)를 편성하는데도 후원하였다. 아울러 1944년에는 잡지 『아시아와 아메리카[Asia and the America]』에 「한국과의 교역을 권한다[Do Business with Korea]」라는 기고문을 게재하여 한국의 실정을 세계에 널리 홍보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미국 버지니아주 핫스프링[Hot Spring]에서 태평양 연안 12개국 대표 160명이 참석한 태평양문제연구회[IPR(Institute of pacific Relation)]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독립문제를 공론화하고자 하였다. 1945년에는 항일 무장 투쟁 계획인 냅코(NAPKO) 작전에 참여하였으나 종전으로 무산되었다.

해방 이후 유일한은 귀국하여 유한양행을 재정비하고 이듬해 초대 상공회의소 회장으로 취임하여 상공업재건에 앞장섰으나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스탠포드대학원에서 국제법을 전공하였다. 이후 1953년 귀국하여 복구작업에 앞장섰으며, 유한양행은 1950년대 말 한국 최대의 제약회사로 부상하였다. 그런가 하면 유일한은 교육사업에도 투신하여 자신의 사재를 투자해 1952년 고려공과기술학원[현 유한공업고등학교]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한편 1962년에 이르러 유한양행은 영등포구 대방동[현 동작구 대방동]에 현재의 사옥을 신축하여 이전하고 화장품의 제조시설을 신설하였다. 특히 1964년에는 수입에만 의존하던 결핵치료제의 원료인 파스칼(pascal)의 합성제조를 위하여 국내 최초의 합성공장을 부천 소사에 신축하였다.

유일한은 1969년 경영의 제일선에서 은퇴하였다. 유일한은 500여명의 주주앞에서 1968년 모범납세 우수업체로 인정받은 ‘동탑산업훈장’을 신임 조권순(趙權順) 사장에게 물려주면서 자신은 회장직으로 물러났고, 2년후인 1971년 7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유언장에서 유일한은 생전에 소유했던 유한양행 주식 14만9백41주[당시 싯가 2억5천5백만원] 전부를 유한중고교 재단인 한국사회 및 교육신탁기금에 기증하여 재산 일체를 사회교육사업에 쓰도록 밝히고, 자신의 직계가족인 아들 유일선(柳逸善)에게는 유산을 상속하지 않겠다는 말을 남겼다.

[저술 및 작품]

유일한의 대표적 저서로는 소년기 회고록인 『한국에서의 소년시절[When I was a boy in Korea]』이 있는데, 1928년 미국에서 발행되어 미국인들에게 한국의 실상을 간접적으로나마 홍보하는 역할을 하였다.

[묘소]

유일한의 묘소는 서울특별시 구로구 항동 유한공업고등학교 교내에 조성된 유한동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유일한은 1970년 국민훈장 모란장과 1971년 무궁화장을 수여받았다. 또한 1995년에는 독립운동 행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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