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588
한자 盧思愼
이칭/별칭 자반(子胖),보진재(葆眞齋),천은당(天隱堂),문광(文匡),선성부원군(宣城府院君)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선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427년연표보기 - 노사신 출생
활동 시기/일시 1453년 - 노사신 식년시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458년 - 노사신 사간원 좌정언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62년 - 노사신 동부승지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71년 - 노사신 순성명량좌리공신 책봉
활동 시기/일시 1476년 - 노사신 선성부원군 승진
활동 시기/일시 1492년 - 노사신 좌의정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94년 - 노사신 영의정 제수
몰년 시기/일시 1498년 12월연표보기 - 노사신 사망
묘소|단소 노사신 묘소 -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윗도장2길 64
성격 문신
성별
본관 교하
대표 관직 영의정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지역에 묘소가 있었던 조선 전기 문신.

[개설]

노사신(盧思愼)[1427~1498]은 할아버지 노한이 세운 효사정에 기문이 없자 강희맹에게 직접 부탁하여 효사정의 기문을 마련한 사람이다. 기문에는 효사정의 당시 위치를 비롯해서 정자가 세워지게 된 배경과 명칭이 정해진 상황 등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전해진다. 효사정은 이름을 정한 때와 기문 작성 시기에 차이가 크다. 효사정으로 이름을 정한 강석덕(姜碩德)노한의 아들 노물재(盧物載)와 동서간이었다. ‘효사정’이라 이름 정해진 지 약 30여 년이 지나서 노사신강석덕의 아들이자 외사촌형인 강희맹에게 기문을 요청하였다. 이때 노한강석덕은 모두 사망한 뒤였다. 그러나 노사신은 젊었을 때 할아버지 노한을 곁에서 모시면서 정자의 이름을 짓던 당시를 보았던 터였다. 당시를 회상하면서 강희맹에게 아버지 강석덕의 뜻을 이어 기문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세 번이나 사절하던 강희맹노사신의 거듭된 요청에 기문을 쓰게 되었다.

[가계]

노사신의 본관은 교하(交河)이다. 자는 자반(子胖), 호는 천은당(天隱堂), 재호(齋號)는 보진(葆眞)이다. 할아버지는 우의정을 지낸 공숙공(恭肅公) 노한(盧閈)이고, 아버지는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노물재(盧物載)이며, 어머니는 심온(沈溫)의 딸로 세종의 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동생이다. 우의정을 지낸 노한에 이어 노사신이 영의정을 맡아서 할아버지와 손자가 연이어 정승이 된 집안이다.

[활동 사항]

노사신은 1451년(문종 1) 증광시 생원에 합격한 후, 1453년(단종 1) 27세의 나이로 식년시 문과에 병과 1위, 즉 33명 급제자 중 4등으로 합격하였다. 그러나 1455년(단종 3)에 어머니 상을 만나 상례 기간 동안 관직을 떠나 있다가 상복을 벗고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제수되었다. 1462년에 관품을 크게 뛰어올라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제수되었다. 이어 도승지(都承旨)에 임명되고 추충정란익대공신(推忠靖難翊戴功臣)에 책봉되었다. 연달아 승진되어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성종이 즉위하는데 보좌한 공으로 1471년(성종 2)에 순성명량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에 책봉되었다. 1476년에 선성부원군(宣城府院君)으로, 다음해에는 우의정(右議政)으로 각각 승진하였다. 1492년(성종 23)에 좌의정에 오르고, 1494년에 영의정이 되었다가 같은 해 가을에 부원군(府院君)으로 임명되었다. 연산군이 즉위한 후인 1498년(연산군 4) 12월에 72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1463년(세조 9)에 세조가 주석(註釋)한 『역학계몽(易學啓蒙)』의 주석서 『요해(要解)』를 증보하여 왕에게 올리고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1465년에 『경국대전(經國大典)』 편찬을 총괄하고, 『경국대전』 호전(戶典)의 직접 편찬을 담당하였다. 서거정 등과 함께 1476년(성종 7)에는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1481년(성종 12)에는 『동국통감(東國通鑑)』 편찬에 참여하였다. 표종형인 강희맹(姜希孟)을 비롯하여 서거정·성임(成任)·양성지(梁誠之) 등과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편찬사업을 이끌었다.

서사(書史)를 두루 공부해서 능통하지 못한 것이 없었으며, 불경(佛經)과 도서(道書)까지도 모두 보았다. 만년에 거처하는 당(堂)을 ‘천은당(天隱堂)’이라 이름하고 옛사람의 서화(書畫)를 모아 보관하며 살피기를 즐겼다.

[묘소]

노사신의 묘소는 현재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상도동의 경계에 있었으나 1940년에 경기도 파주군 주내면 백석리로 이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광(文匡)으로, 두루 남에게 듣고 본 것이 많아서 문(文)이라 하고, 마음이 곧고 생각이 크다고 하여 광(匡)이라 하였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3.06.19 강석덕과 노한의 관계 수정 강석덕은 노한의 아들 노물재와 동서지간임
2023.06.05 내용 수정 노사신의 묘 위치를 효사재 안내문에 따라 노량진동에서 대방동과 상도동의 경계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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