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608
한자 鄭廣成
이칭/별칭 수백(壽伯),제곡(濟谷)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선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76년연표보기 - 정광성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03년 - 정광성 식년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36년 - 정광성 도승지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54년 - 정광성 자헌대부 제수
몰년 시기/일시 1654년연표보기 - 정광성 사망
묘소|단소 정광성 묘소 -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 산32-2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동래
대표 관직 형조판서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지역에 묘소가 있는 조선 전기 문신.

[가계]

정광성(鄭廣成)[1576~1654]의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자는 수백(壽伯)이고 호는 제곡(濟谷)이다. 정복겸(鄭福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유길(鄭惟吉)이다. 아버지는 좌의정 정창연(鄭昌衍)이고, 어머니는 한세건(韓世建)의 딸이다. 동생은 참판 정광경(鄭廣敬)이고,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의 아버지이다. 정유길정창연, 정광성에 이르도록 3대가 모두 과거급제 후 홍문관에서 관직을 시작하였다.

[활동 사항]

1601년(선조 34)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1603년(선조 36)에 28세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첫 번째로 제수된 곳이 홍문관으로 검열(檢閱)과 대교(待敎) 등을 지냈다. 1605년(선조 38) 이후 정자(正字)·수찬(修撰)·교리(校理)·지평(持平) 등 젊은 나이에 삼사의 명망있는 관직을 두루 거쳤다.

1618년(광해군 10)에 인목대비에 대한 폐모론이 일었을 때, 아버지 정창연이 탄핵을 받았다. 하지만 정광성의 관력은 끊이지 않고 형조참의·우승지 등을 지냈고, 지방관으로 남양부사와 경기도관찰사 등을 맡았다. 1636년(인조 12)에 도승지가 되었는데 1638년(인조 14) 겨울에 병자호란이 발발한 후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효종이 즉위한 후 1654년(효종 5)에 아들 정태화가 영의정이 되었다. 임금이 정광성의 품계를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올려주고 중앙으로 불렀다. 당시 팔십에 가까운 노쇠한 나이를 이유로 여러 번 사양하다가 임금의 뜻에 따라 같은 해에 형조판서에 오른 뒤 부호군을 거쳐 지돈녕부사가 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4월에 사망하였다.

[묘소]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 산32-2번지에 부인 여흥 민씨(麗興閔氏)의 묘와 함께 있다.

[상훈과 추모]

신도비는 이수와 비신이 한 돌로 연결되어 있다. 비문은 이경석(李景奭)이 지어 썼고, 두전(頭篆)은 이경석의 조카로, 글씨로 유명한 이정영(李正英)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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