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628
한자 金奎植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장경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1년 1월 29일연표보기 - 김규식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04년 - 김규식 프린스턴대학 석사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18년 - 김규식 신한청년단 조직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김규식 파리강화회의 한국대표 파견
활동 시기/일시 1922년 - 김규식 극동 피압박 민족대회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33년 - 김규식 민족혁명당 창당
활동 시기/일시 1943년 - 김규식 대한민국임시정부 부주석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48년 - 김규식 남북협상 참여
몰년 시기/일시 1950년 12월 10일연표보기 - 김규식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9년연표보기 - 김규식 대한민국장 추서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제단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임시정부 부주석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봉안된 독립운동가.

[개설]

김규식(金奎植)[1881~1950]은 미국 유학 후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 및 교육에 힘썼고, 임시정부 부주석을 맡은 인물이다.

[가계]

김규식의 아버지는 김지성(金智性)이고 어머니는 경주 이씨이다.

[활동 사항]

김규식(金奎植)은 1881년 1월 29일 태어났다. 본적은 강원도 홍천이나, 출생지는 아버지 김지성이 근무한 부산 동래부로 보인다. 김규식의 아버지는 개항 당시 일제의 불평등 무역을 지적하였다가 귀양갔고, 어머니 경주 이씨 또한 김규식이 4세 때 사망하였다. 고아가 된 김규식언더우드((Horace Underwood) 목사에게 입양되었고, 고아원인 언더우드 학당[후일 경신학교]에서 근대식 교육을 받았다. 이곳에서 자연스레 기독교를 접하고 영어를 배웠으며 갑오개혁 이후 세워진 관립외국어학교 1기생이었다.

김규식은 당시 서재필을 중심으로 결성된 독립협회에 관여하였고 이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의친왕 이강을 비롯하여 한인 유학생들이 있었던 로아노크 대학을 졸업하고, 프린스턴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1904년에 귀국하였다. 이후 계몽운동에 힘쓰던 김규식은 한일강제병합으로 국권이 일제에 의해 피탈당하자 상해로 망명하여 동제사에서 활동하였다.

1918년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로 파견되었고 이어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 외교활동을 벌였다. 1921년 다시 상해로 돌아가고 1922년 1월 소련으로 가서 극동 피압박 민족대회에 참가하여 레닌에게 조선독립의 후원을 요청하였다. 1923년 상해에서 새로운 임시정부 창조를 꾀하고 연해주로 갔으나 레닌의 사망 이후 소련의 후원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다시 상해로 돌아온 후 영문학을 가르치는 등 교육에 종사하며 독립을 위해 중국과의 연합을 꾀하였다. 대한독립당 대표였던 김규식은 1933년 조소앙, 김원봉과 함께 민족혁명당을 창당하였다. 1943년 임시정부 부주석을 맡았다.

광복 이후에는 과도입법의원의 의장을 맡았다. 미군정기 좌우합작운동을 시도하려던 의도가 담겨져 있었지만, 여운형을 비롯한 중도파들이 대거 탈퇴하였다. 김규식은 이후 단독정부 수립을 막고자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6·25전쟁 이후 납북되어 1950년 12월 10일 사망하였다.

[묘소]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제단에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김규식에게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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