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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생활 - 8개월 동안 두 번 만난 신혼부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1D020204
지역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병암1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서영숙, 정연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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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생활

오덕욱 할아버지 댁은 1·4후퇴 때 집이 다 타버렸기 때문에 광 한 칸에 가족이 모두 살고 있어서 혼인을 치르고도 신부를 데리고 갈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분들은 그날 다 내려왔지만 오덕욱 할아버지만 신부집에 5일 정도 더 묵다가 병암1리로 내려오고, 그 뒤로 8개월을 떨어져 지냈다. 오덕욱 할아버지는 8개월 동안 김금자 할머니를 보러 추석 때 한 번 가고 서울 가던 길에 잠깐 들릴 정도로 무심했다고 한다.

“조금 서운했지요. 그래도 기다렸지요. 안 오니깐. 왔다가도 바로 가더라고요. 또 고 다음에 4월 달에 왔는데 인제 서울로 뭐 취직을 하러 간대나 그러면서 가더니 올 적에 들려갈 줄 알았더니 그냥 내려오더라고요. 그러고선 여럿 날 안 와요. 안 오더니 8월 달이 됐는데 인제 온다고 소식은 들었는데. 고종사촌 오빠한테 들었는데 안 오는 겨. 그래서 또 안 올려나 보다 속으로 그러고는 언니들이요 저 사촌언니가 바로 이웃에 살았는데 언니들이 오더니 무슨 신랑이 그런 신랑이 있느냐고 또 막 흉을 보는 겨. 어찌나 부아가 나던지 집에 와서 막 지랄을 했어 어머니한테다. 나 이제 이곳 말고, 시집 안 간다고. 그런 사람이 어디 있냐고. 그래 그래서 왔어요. 그날 우리가 마당질을 하는데 열엿새날 왔더라고 보름날 안 오고 왔어. 그래서 내가 아니 어떻게 왔느냐고. 그러니까 이래요. 저기 동네 운동회 구경하고 이러고 오느라고 그랬대요. 그래 뜀뛰고 그러는 재미로다가 늦게 왔잖아. 그래도 말도 못했지. 뭐 인제 그러고는 그냥 같이 자고 이러고서는 또 며칠 있다가 가더라고.”

오덕욱 할아버지가 멋쩍은 듯 웃다가 변명 아닌 변명으로, 당시에는 돈도 없고 자신이 너무 어려서 신부를 보러 가야겠다는 그런 생각이 없었다고 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어리석었다며 쑥스러워 했다.

“몰랐어, 우리는. 나이가 이십이 넘었어도, 우리 아내다 이런 걸 몰랐어. 그러니깐 안 가는겨. 아 왕창 기다렸을 테지.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어리석었을 꺼야. 그때만 해도 돈이 없잖아, 돈이. 갈라면 돈도 가져야 하지. 이러니 못 가는 거야. 그렇다고 가고 싶었다는 생각이 없었다지. 가고 싶으면 어떻게 해서든 가지. 가고 싶지 않으니깐 못 갔을 테지. 생각이 없으니깐.”

떨어져 지내는 동안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그때에는 우편이 없어서 장사를 하던 사촌오빠가 오고가며 전해주었다. 김금자 할머니가 시집올 때 모두 모아 가지고 왔는데, 나중에 할머니가 친정에 가있을 때 오덕욱 할아버지가 다 태워버렸다고 했다. 그 귀중한 자료를 왜 그러셨냐고 여쭈니, “그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깐 너무 추하더라고” 했다.

그리고 그해 가을에 지금 사는 집을 짓고 김금자 할머니와 함께 음성으로 내려왔다. 신부가 시댁으로 시집을 올 때는 신랑이 데리고 와야 하는데 오덕욱 할아버지는 데리러 가지 않겠다고 해서 또 한바탕 난리가 났다고 하였다.

“그러더니 인제 장가를 들러 온다 그러는데 오빠가 그러는데 그랴 그냥 여기 와서 본다고 안 데리러 간다고 그러더랴. 그래서 나는 그때 그랬지 내가 엄마 보고 나 신랑이 안 데리러 오면 안 간다고 시집 안 간다고 그랬어요. 신랑이 데리러 와야 간다고 그랬더니 그 소릴 들었는지 어떻게 했는지 데리러 왔더라고요. 그랬어요. 그렇게 그래서 10월 29일 날 만나기로 했는데 4일 날 저녁에 왔더라고 오빠하고. 사촌 오빠가 따라왔는데 차를 타는데 신랑이 내 옆에 앉아야 하잖아? 오빠 옆으로 보내고 자긴 따로 앉아요. 그래서 엄마가 그걸 보고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도 모른댜. 데려가서도 저러면 어떡하나 싶어가지고. 그러니깐 자기는 예의를 지키느라 그랬겠지.”

오덕욱 할아버지는 예의를 지켜서 편하게 가라고 그렇게 배려한 것인데 김금자 할머니는 많이 속상했다며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서운한 감정이 남아 있는 듯 했다.

그렇게 버스를 타고 생극 소재지까지 와서 내리니까 가마꾼들이 가마를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할머니는 가마를 타고 할아버지는 걸어서 집까지 왔다고 한다.

조사자가 가마 타고 들어올 때 특별한 풍습이 없었는지 여쭈었다.

“뭐 이렇게 저기 그 저기 하는 게 뭐지? 숟가락을 이렇게 놓고서는 거기 그 동그란 양푼을 업어놓고서는 거기다 와당탕 일제히 떨어트리고 갔어. 요기 문 앞에 들어올 때 집에 들어와서 봉당에 올라서면서 요렇게 양푼을 해 놓고서는 (숟가락을) 떨어트린 거야. 소리 나게”

또 신랑은 들어오자마자, 한쪽 다리는 주방 부뚜막에 올려놓고 청포묵을 먹었다. 신부는 안방으로 들어와 밤이 될 때까지 아랫목에 앉아 있어야 했다. 이때 마을 여자 분들이 구경을 와서는 “10개월 만에 왔는데, 애기 한 명 데리고 올 줄 알았는데 혼자 왔다”며 “애기가 배에 있냐, 없냐.” 하며 놀렸다고 했다.

혼수는 따로 없고 은반지 1개와 김금자 할머니가 신을 버선, 치마, 저고리를 열 벌씩 해왔다. 열 벌이 ‘한 죽’ 혼수로 기본 한 죽씩 해오고 많이 할수록 좋았다고 설명해 주었다. 김금자 할머니는 손재주가 좋아서 인두판과 횃대보도 직접 해왔다며 꺼내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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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두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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횃대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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