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6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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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泰永 |
영어공식명칭 | Lee Taeyoung |
이칭/별칭 | 사앙(士仰),동전(東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금대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임현채 |
[정의]
경기도 가평군에 묘가 있는 조선 후기 문신.
[가계]
이태영(李泰永)[1744~1803]의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자는 사앙(士仰)이고, 호는 동전(東田)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집(李潗), 할아버지는 호조 정랑 이병건(李秉建), 아버지는 군자감 정 이산중(李山重)이다. 어머니는 교관(敎官) 조겸빈(趙謙彬)의 딸이며, 부인은 유한갈(兪漢葛)의 딸이다.
[활동 사항]
이태영은 1772년(영조 48) 정시 문과에 병과 5등으로 급제하였다. 이후 주로 삼사에서 복무하였다. 1778년(정조 2)에는 부교리(副校理)·정언(正言)으로 활동하였으며, 1779년(정조 3)에는 시독관(試讀官)으로 복무하였다. 1779년(정조 3) 교리로 승급하였으며, 금직(禁直)[당직] 문신을 대상으로 한 시험에서 수석을 받았다. 1784년(정조 8)에는 부수찬(副修撰)이 되었으며, 10월에는 진하사은 겸 동지사(進賀謝恩 兼 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85년(정조 9) 지제교(知製敎)로 초계(抄啓)[왕에게 선발하여 아룀]를 받았고, 왕세자의 서연 때 통정대부로 승진하였다. 1786년(정조 10)에는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으나 채제공(蔡濟恭)[1720~1799]의 죄상을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삭직되었다.
1787년(정조 11)부터는 지방관을 역임하는 일이 늘어 양주부윤(楊州府尹)과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 부임하였다. 1790년(정조 14)에는 양덕현령(陽德縣令)[양덕현은 지금의 평안남도 양덕군]이 되었고, 1792년(정조 16)에는 장단부사(長湍府使)[장단부는 경기도 북서부에 있었던 장단군의 조선 시대 이름]와 황해도관찰사를 지냈다. 1795년(정조 19)에는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여 1797년(정조 21)까지 복무하였다. 1797년 내직으로 복귀하여 가선대부로 품계가 올랐고, 사간원 대사간, 승지, 형조 참의 등을 지냈다. 1798년(정조 22)에는 공조 참판과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였고, 1799년(정조 23)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1800년(정조 24) 청나라 칙사를 접대하기 위한 물자를 결손시켰다는 이유로 탄핵받았다.
한편, 1801년(순조 1)에 아들 이희갑(李羲甲)[1764~?]도 부호군(副護軍)으로 복무하였는데, 아버지인 이태영을 위해 서번(西藩)에 나아가 흉악한 무리들과 결탁하였다는 이유로 탄핵받았다. 이희갑은 칠원(漆原)[지금의 경상남도 함안군]에 유배되었고, 이태영은 평안도관찰사에서 체직되었다. 그러나 이희갑은 곧 석방되었고, 이태영도 1801년(순조 1)에 예조 참판에 올랐다. 이후로도 이태영은 전 평안도관찰사 자격으로 조선의 북방 경계에 관한 자문을 남기기도 하였다.
[묘소]
이태영의 묘는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금대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