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1034
한자 證心寺翠栢樓
분야 종교/불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광주광역시 동구 증심사길 177[운림동 56]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최원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609년연표보기 - 증심사 취백루 건립
중수|중창 시기/일시 1998년 - 증심사 취백루 복원
중수|중창 시기/일시 2020년 - 증심사 취백루 중수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1년 - 증심사 취백루 6.25전쟁 때 화재로 소실
성격 누각|전통문화관
창건자 석경|수장|도광

[정의]

광주광역시 동구 운림동에 있는 증심사 경내에 있는 2층 누각.

[개설]

증심사(證心寺) 취백루(翠栢樓)는 증심사 일주문을 지나 오른쪽 언덕 위에 있는 2층 누각으로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1609년(광해군 원년)에 중건하였다.

[건립 경위 및 변천]

취백루라는 이름은 1574년(선조 7) 고경명(高敬命)무등산을 유람하고 쓴 「유서석록(遊瑞石錄)」취백루에 올라 휴식을 취하고 권홍(權弘) 등 여러 사람의 시판을 보면서 '잣나무가 뜰 앞에 푸르다[백수정전취(栢樹庭前翠)]'라는 글귀에서 따서 지은 것이라고 하였다. '백수정전취'라는 글은 고려 명종 때의 문신인 김극기(金克己)가 지은 시에서 취한 것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광산현(光山縣) 기록에 시가 남아 있다.

원래 '취백'이라는 시구는 중국 당나라 조주(趙州) 선사 (禪師)가 제자와 나눈 선문답에서 나오는데, 제자가 "조사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이 무엇입니까[여하시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라고 묻자 조주 선사가 "뜰 앞의 잣나무[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고 대답한 데서 취백루의 이름이 연유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정유재란 때에 불탄 것을 1609년(광해군 원년)에 석경(釋經), 수장(修裝), 도광(道光) 세 승려가 증심사를 사창(四創)하면서 다시 중창하였다고 하였으나, 1868년(고종 5)에 나도규(羅燾圭)가 쓴 「서석록(瑞石錄)」에는 임진과 정유의 변화로 인해 취백루가 사라지고 고경명의 기록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고 하였다.

취백루 아래층은 사천왕상을 모시고 있었으며, 대웅전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사찰 경내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6.25전쟁 때 불타 버린 것을 1998년 당시 주지였던 영조(永照)가 복원하였고, 2020년 새로 단장하여 아래층은 종무소로 쓰이고, 2층은 강의실과 시민들의 문화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활동 사항]

『신증동국여지승람』 광산현 불우조(佛宇條) 증심사 기록에 남아 있는 김극기의 시는 다음과 같다.

백수정전취(柏樹庭前翠)[잣나무는 뜰 앞에서 푸르고]

도화맥상홍(桃花陌上紅)[복사꽃은 언덕 위에서 붉구나]

하수수권외(何須搜券外)[어찌 반드시 지경 밖에서 찾으랴]

지요멱환중(只要覓環中)[다만 둘리어 있는 속에서 찾을 것이로다]

체경심종새(滯境心終塞)[막힌 경내에서는 마음도 끝까지 막히나니]

망언도시통(忘言道始通)[말을 잊어야 도가 비로소 통하는 것이다]

하인명차사(何人名此寺)[누가 이 절 이름을 지었는가]

묘온독심궁(妙蘊獨深窮)[묘한 이치를 홀로 깊이 궁리하였도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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