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0370
한자 道路
영어공식명칭 Road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윤희철

[정의]

광주광역시 내에 사람과 물자 수송을 위해 건립된 길.

[개설]

도로(道路)는 사람, 차 따위가 잘 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길이다. 광주광역시에서 도로의 시작은 언제부터인지 확인이 어렵다. 원도심을 구성하는 유사한 패턴의 도로망이 통일신라시대 9주 5소경이었던 지역에서 일부 발견되는 것을 보면, 도로의 역사는 대단히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12년 작성된 지적원도에 이미 자동차나 인력거 등이 다닐 수 있는 도로의 형태가 발견되는 것을 보면, 근대 시기 이전부터 농경국가였던 조선에서도 최소한의 도로는 있었던 것을 추정할 수 있다.

다만 중국과의 교류를 위해 사용했던 현재의 국도 제1호선 노선에서 한양[현재 서울]을 중심으로 지금의 신의주까지는 도로를 잘 활용했지만, 남쪽으로는 활용도가 떨어져 어느 정도 사용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도시가 발달하였고, 각 도시를 연결하면서 도시 내의 교통망이 필요하게 되어서 도로의 역할은 더욱 중시되었다. 최근에는 자동차 중심의 도로교통 체계에서 시민의 건강과 안전, 도시의 활력을 위한 보행자 중심의 도로 체계도 논의되고 있으며, 자전거, 전동 킥보드 등과 같은 1인 교통 수단을 도로에서 주행하는 논의도 진행 중이다.

[근대 시기 도로의 시작]

1882년 임오군란 직후 김옥균은 박영효와 일본에서 만나 치도정책의 중요성을 논의하고, 치도약론[치도약칙]을 제시한 후 한성부에 치도국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정치·사회·경제적인 한계에 부딪쳐 이 같은 치도에 대해서는 갑오경장 이후 극히 제한적인 범위에서 시도되었으며,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추진되었다. 1906년 초 통감부를 개설한 일제는 식민지화를 위해 한국정부에 기업자금채(起業資金債)를 제공, 개항장과 해관공사[1906년 이후 8개년 계속사업]와 더불어 제1기 치도공사를 강요하였다. 1897년 10월 1일 개항한 목포항도 제1기 치도공사의 대상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도로의 변화]

통감부는 기업자금채 일부를 나누어 1906년 3월 건설의 중요도로인 진남포-평양-원산 간, 광주-목포 간, 대구-경주-영일만 간, 전주-군산 간의 4곳 132리[약 52㎞]의 공사에 착수하였다. 예산은 149만 6000원이었으며 목포-광주 간 거리는 86.92㎞였다. 도로부지에 대해서는 일본인 소유자는 대개 무상기부하였고, 한국인 소유지는 정부 직원이 직접 출장을 가서 대가를 지불하였다.

통감부는 1908년 제1차 계획과 관계된 4개 노선의 개수를 속행하는 한편, 제2차 계획으로 경기도 수원-이천 간 외 6개 노선 개수공사를 그 해 5월에 착수하였으며, 여기에 드는 총 공사비는 154만 7472원이었다. 목포-광주선의 거리는 22리 5정[약 8.8㎞]으로 예산은 43만 7314원이 투입되었으며 1910년 12월 준공되었다.

1938년 12월 1일 조선도로령 제정으로 기존 도로규칙이 폐지되고, 도로는 국도, 지방도, 부도, 읍면도 등 4가지 종류로 관리되었다. 일제강점기 치도사업의 특징은 첫째, 도로의 네트워크 형성이 대륙 진출을 뒷받침하는 수단이었다는 점이다. 주축이 되는 1등도로는 모두 북쪽 방향이었다. 둘째, 치안과 군사 활동 등을 위해 도로 네트워크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는 점이다. 도로 네트워크 건설은 경제적 수탈을 위한 수단이었는데, 대대적인 개발 붐으로 식민지 통치 효과를 누리는 동시에 기존 지역질서가 파괴되는 결과도 초래하였다. 또한 기부로 용지를 취득하고, 부역을 통해 사업비를 절감하였다.

[근대 시기 광주 도로의 시작과 변화]

1907년 당시 중요시된 도로망은 목포에서 영산포까지의 배편과 연결되는 영산포-광주, 광주-태인, 광주-남원, 목포-마산 등이었다. 일제는 의병항쟁 진압과 도로 치수를 동시에 또는 앞서 시행하는데, 예를 들어 광주에서 북동쪽으로 전라북도 남원, 안의[경상남도 함양의 옛 지명]를 거쳐 경상북도 김천에서 대구로 통하는 경부가도는 통감부 설치 이후 일본군이 의병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긴히 사용되었다. 1910년 준공된 새로운 국도 광주-목포선도 이러한 관점에서 1909년 8월, 40일간의 전남폭도대토벌작전과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광주-목포 간에서 마차나 인력거로 영산포를 거쳐 다시 수로로 연결되는 일정에서 자동차를 이용하면, 광주-목포선으로 인해 소요 시간이 4시간 이내로 단축되었다고 한다.

1910년에는 전주-광주선이 기공 또는 계획되었는데, 이는 1등도로인 경성-목포선에 포함된 것으로, 광주-김천 간의 도로의 일부가 2등도로인 광주-안의선으로 지정되었다. 1911년 7월 25일 조선총독부 고시 제236호로 지정된 1등도로 16선과 2등도로 3선 가운데 전라남도와 관련된 것은 1등도로 경성-목포선, 2등도로 전주-여수선[남원, 순천 경유], 광주-안의선[남원 경유], 광주-보성선, 광주-순천선[화순, 학구정(鶴口亭) 경유], 나주-해남선, 영암-장흥선, 마산-우수영선[진주, 순천, 해남 경유] 등 7개 노선이었다.

1912년 12월 개수할 예정이었던 3등도로 28선 총연장 180여 리[약 70.7㎞]를 공표하였다고 한다. 그 중 광주군과 관련된 것은 광주-송정리정거장, 광주-창평-곡성, 광주-영광-법성포, 영산포-광주, 구례-광주, 벌교-광주, 나주-장성 등 7개 노선이었다. 이 도로는 현재도 국도로 사용 중이다.

1914년 4월 11일자 조선총독부 고시 제135호 및 12월 2일자 고시 제571호로 전국 각 주요도시의 시가지 내 원표 위치 및 1, 2등도로를 공표하였다. 이때 정해진 광주의 원표는 '화원정, 1등도로 경성선과 1등도로 목포선의 분기점', 즉 현재의 충장로4가에서 공원다리로 향하는 삼거리에 있었다. 당시 1등도로는 원표로부터 수기옥정 및 누문리를 거쳐 경성으로 향하는 도로와 화원정을 거쳐 목포로 향하는 도로였고, 2등도로는 북문통 및 남문통을 거쳐 순천으로 향하는 도로였다.

1914년 8월 22일 조선총독부 고시 제334호로 2등도로선이 개정되었는데, 광주와 관련된 것은 광주-법성포 간[송정리 경유]이 추가되었다. 이 구간 중 일부인 광주-송정리는 1914년 국유철도 호남선 전 구간이 개통된 시점에 전후해 개수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14년 4월 광주-송정리 간 마차조합이 조직되고, 1917년경에는 이미 매일 4차례 자동차 왕복으로 광주-송정리 간의 소요 시간이 20분으로 단축되었다. 또 장성을 통과하는 1등도로와 담양, 화순으로 향하는 2등도로도 동시에 개수되고 있었다. 1917년까지의 광주의 교통 운수에 대한 개괄적인 상황은 『광주지방사정』[1917]에서 찾아볼 수 있다. “광주의 구시가는 유럽이나 중국 등과 같이 소위 성시로, 성곽의 문과 문을 통해 큰 도로는 성외의 교통을 맡고, 성내의 각 소로는 성내의 교통을 맡는 구조를 갖고 있었으며 대부분 불규칙하였다”고 한다.

국도로는 목포에서 광주를 경유해 서울에 이르는 1등도로 경목선[광주에서 남평에 이르는 3리 31정 55간[4.66㎞], 나주에 이르는 6리 34정 36간[6.13㎞], 장성에 이르는 6리 27정 6간[5.31㎞]], 광주에서 안의에 이르는 2등도로 광의선[담양에 이르는 5리 11정[3.16㎞]], 광주에서 순천에 이르는 2등도로 광순선[화순에 이르는 4리 2정 12간[1.81㎞], 순천에 이르는 미완성 부분이 있음], 광주에서 송정리에 이르는 2등도로 광송선[송정리정거장에 이르는 3리 5정 57간[1.83㎞]] 등이 있다.

이도(里道)로는 무등산 수원지 및 증심사로 통하는 1리 22정 2간[2.8㎞]과 양림리로 통하는 미완성 도로만이 있으며, 다른 지역으로 통하는 이도는 대개 과거의 논두렁이나 밭두렁에 있는 협소한 길이었다. 도로의 풍치와 행로의 위생을 위해 이들 도로에 나무를 식재하였다.

1925년 광주면의 도로 연장은 10,343간[18.62㎞]이었다. 1912년 3,560간[6.41㎞]이었던 도로 연장은 1916년 7,892간[14.21㎞], 1921년 8,006간[14.41㎞] 등으로 급증하였고, 그에 따라 자동차, 인력거 등의 수도 늘어났다. 1926년 당시 1등도로인 경성-목포선에 포함되는 전라북도 남쪽에서 전라남도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1개선 34리[13.35㎞] 공사를 모두 개수하였다. 각 군 간 및 주요항만을 연결하는 2등도로 8개선 161리[63.2㎞]의 중추 부분은 대체로 개수를 마쳐 전라남도 도로의 간선이 되고 있으며, 3등도로는 38개선 연장 258리[101.32㎞]로, 개수를 마친 곳은 238리[93.47㎞], 미개수한 곳에 속하는 20리[7.85㎞]도 조만간 개수를 마쳐 이용에 만전을 기할 예정이었다.

1937년 작성된 광주시가지계획[안]에는 도로망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였다. “광주부 내의 가로는 종래 질서도 없고 계통도 없는데다 노폭이 협소하여 심히 불편하므로 1918년 이후 지방비, 지방비 보조 또는 면[읍]비로 시가도로개수공사를 시행하였다”고 한다.

1938년 12월 1일 조선총독부 고시 제956호 및 조선총독부 전라남도고시 제216호에 따른 광주 관련 국도와 지방도가 결정되었다. 같은 날 조선총독부 전라남도는 조선도로령 시행규칙 제21조 제2항의 규정에 의해 고시 제217호로 부읍면 내에 있어서 도로원표의 위치를 정하였다.

[광복 이후 도로의 건설과 변화]

1939년 광주시가지계획을 수립하면서 현재 제1순환로를 중심으로 도로망 계획이 확정되었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태평양전쟁으로 일제는 도로계획을 실제 사업으로 연결하지 못하고 패망하였다. 『광주광역시 도시계획사 연구』[2011]는 지적현황을 분석하면서 1953년경 현재의 제1순환로의 초기 도로선이 보인다고 밝혔다. 이후 도시가 확장하면서 도로의 수요가 증가하지만, 광주시의 열악한 재정상황으로 인하여 도로건설을 직접 하지 않고, 토지구획정리사업 등의 사업을 통해 도로부지를 확보한 후, 추후 재정 여력이 되는 과정에서 아스팔트 포장을 하는 방식으로 도시 내에서 필요한 도로를 확보하였다.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망의 변화]

광주시의 확장에 따라 1967년 도시계획을 재정비하고 기존의 도로망을 유지하면서, 시 외곽으로 도로 노선이 크게 증가하였고, 이러한 경향은 1975년 도시계획재정비, 1982년 도시기본계획에 반영되었다. 인구 증가와 도시의 발전에 따라 도로망의 필요성은 더욱 크게 재기되었고, 현재와 같은 도로망이 만들어졌다.

[현재 광주의 도로]

현재 광주광역시에는 무안광주·광주대구·호남·고창담양·강진광주·광주외곽순환고속도로가 있다. 국도는 국도 제1호선, 국도 제13호선, 국도 제22호선, 국도 제29호선이 있고, 순환도로는 제1순환로, 제2순환로가 있다. 국가지원지방도는 제49호, 제55호, 제60호가 있고, 지방도 제734호가 있다.

도로시설은 327개 노선 565㎞, 면적은 1612만 4100㎡이고, 도로안내표지판은 3,148개가 있다. 도로부속물은 481개소, 113㎞이며, 도로시설물은 265개소이다. 교량 198개, 고가도로 16개, 지하차도 15개, 복개도로 2개, 천벽확장구조물 4개, 터널 12개, 옹벽 11개 등이 있다.

자동차의 이동에 중점을 두었던 과거와 달리 최근에는 녹색교통의 활성화와 시민들의 안전한 이동 등을 이유로 보행환경이 개선되고 있고 자전거 도로가 증가하고 있다. 2018년 12월 말 현재 광주광역시의 자전거 도로는 총 노선 수 300개, 연장 638.1㎞이다. 자전거 전용도로는 26개 노선, 109.34㎞이고, 전용차로 4개, 18.22㎞, 겸용도로 265개, 483.9㎞이다.

인구감소, 고령화 등의 사회문제는 도로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과거와 같이 필요에 따라 도로를 건설할 필요는 있으나, 광주광역시의 유지 관리 역량도 고려해야 한다. 현재는 신규 도로의 개설보다는 기존 도로의 역할을 평가해 시민들이 이용하기 편리하고 쾌적한 도로 환경이 되도록 관리하는 정책으로 변화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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