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단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0721
한자 靑年團體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최소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0년 7월 8일 - 광주청년회 창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0년 7월 - 광주기독교청년회 창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1년 8월 27일 - 송정청년회 창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2년 - 광주ㄱ청년회 창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3년 11월 - 광주여자청년회 창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4~1925년 - 광주여자기독교청년회 창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4년 - 효청노농청년회 창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4년 8월 5일 - 우치노농청년회 창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6년 1월 28일 - 신광청년회 창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6년 2월 - 광주청년연맹 창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6년 2월 7일 - 광주인공청년회 창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6년 2월 17일 - 광주점원청년회 창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6년 2월 18일 - 광주형평청년회 창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6년 3월 - 석곡청년회 창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6년 3월 - 서창청년회 창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6년 9월 1일 - 송정노동청년회 창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7년 가을 - 하남청년회 창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7년 11월 26일 - 광주청년동맹 창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1년 - 광주청년동맹 해체

[정의]

1920년대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 쳥년들에 의해 조직되고 운영되었던 단체 및 사회 운동.

[개설]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는 1920년에 설립된 광주청년회를 시작으로 다양한 청년 단체들이 조직되었다. 초기 청년 단체의 활동은 교육, 강연회 및 토론회 개최, 체육 및 문화 활동, 조선물산장려운동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초기 광주 청년 단체의 조직]

1920년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 최초로 설립된 광주청년회는 청년의 지·덕·체 함양과 친교, 그리고 잘못된 풍속을 개량한다는 목적으로 창립되었다. 주요 간부진은 지주, 상공인, 지식인 등 지역 사회의 유지와 명망가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식민지 민족으로서 민족의 독립을 지지하며 청년 운동에 뛰어들었다.

송정청년회는 1921년 8월에 창립되었는데, 화물의 왕래가 빈번한 지역 특성상 운송업·노동청부업과 관련된 사람이 상당수 차지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광주ㄱ청년회는 1922년경 대촌면 칠석리[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칠석동]에서 창립되어 청년 운동과 농촌 개혁에 힘썼으며, 야학 강습소를 설치하고 운영하였다. 광주기독교청년회는 광주의 기독교계 청년을 중심으로 1920년에 창립되었다. 광주 3.1운동을 주도하였던 인물들이 대거 가담하였던 단체이다.

광주여자청년회는 1923년 11월 창립되어 광주청년회가 경영했던 여자 야학을 인계받아 여자 야학 운영을 중심 사업으로 추진하였다. 광주여자기독교청년회는 1925년 6월 창립되어 여성 선도와 여성 계몽 활동에 힘썼다. 강연회를 열어 여성과 아동 보건 문제에 관해 계몽하였다.

[초기 광주 청년 단체의 활동]

1920년 9월 광주청년회가 여자 야학을 개설한 뒤, 여자 야학은 광주여자청년회로 이관되었다. 광주청년회는 보통학교와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청소년을 위해 학교에 준하는 교육기관인 강습소를 운영하였는데, 이는 1922년 4월 청년학원으로 발전되어 운영하게 되었다. 광주기독교청년회는 1922년 9월 노동 야학을 개설하였고, 1924년에는 하기 아동 학교를 개설하여 아동 교육에도 힘썼다. 광주ㄱ청년회는 학령이 초과되어 입학하지 못하는 무산 아동을 위해 야학 강습소를 설립하였고, 송정청년회도 1922년 송정리사립중학원을 개설·운영하였다.

광주 지역의 청년 단체는 독자적인 강연회와 토론회를 개최하여 지식 계발과 계몽에도 노력하였으며, 다른 사회 단체와 협력하여 각종 강연단의 광주 강연을 적극 후원하기도 하였다. 광주청년회는 전라남도와 전라북도 각지의 청년회와 야구, 정구, 축구 시합을 가지며 친선을 도모하였다. 1921년 3월 영광청년회에서 주최한 전남정구대회에서 우승을 하였고, 4월 호남정구대회를 개최하며 가장 활발한 체육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모르핀 중독자 퇴치와 치료에 힘썼으며, 1920년 여름 괴질(怪疾)이 발생하였을 때 방역대를 조직하여 일반인에게 무료 주사를 놓았고 위생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송정청년회는 풍속 개량, 문화 선전,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취지 아래 극단을 조직하여 공연을 하였다. 광주기독교청년회 역시 문화 선전을 위해 극단을 조직하여 지방 순회 공연을 하였다.

청년 단체들은 토산품 애용 운동 및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하였는데, 1923년 3월 초에 결성된 광주물산장려회에 적극 참여하였다. 광주물산장려회는 1923년 3월 17~18일 시위 행렬을 조직하여 물산 장려의 취지를 선전하였다. 또한, 재난을 당한 동포의 구호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였으며, 광주 지역 홍수 구호 활동뿐만 아니라 황해도 대홍수 재난에도 선전 활동과 의연금을 모집하였다.

[청년 단체의 확산]

광주 최초의 노농 청년 단체인 효청노농청년회가 1924년 결성된 이후 면 단위 청년회들이 결성되었는데, 우치노농청년회·석곡청년회·서창청년회가 연이어 창립되었다. 주위 소작인회와 협력하여 소작권 이동 방지 및 환수 활동을 전개하였고, 농촌 무산 아동 및 여성 교육 사업에도 힘썼다.

노동 청년 단체로는 1926년 2월 광주인공(印工)청년회, 광주점원청년회, 광주형평청년회가 연이어 창립되었다. 1926년 2월에 집중적으로 창립된 직업별 노동 청년 단체는 광주청년회와 긴밀한 협력을 하였고, 노동조건 개선과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 노력하였다.

[청년 단체의 분열]

광주청년회와 광주노동공제회 간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광주노동공제회관을 습격, 건물 일부를 파괴하고 폭행까지 가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이에 광주노동공제회 계열이 1926년 1월 신광청년회를 창립하였다. 신광청년회는 우치노농청년회·효천노농청년회와 함께 1926년 2월 광주청년연맹을 결성하여 광주청년회와 대립하였다. 하지만 광주청년연맹은 뚜렷한 활동을 펼치지 못하였다.

[광주청년동맹의 결성과 쇠퇴]

1927년 11월 계급적 청년 운동으로부터 전 민족적 청년 운동으로의 전환을 촉구하며 광주청년동맹이 창립되었다. 침체 상태에 빠진 광주 청년 운동을 부활시키기 위해 광주군 각 면에 지부를 설치하려고 했지만 실현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눈에 띄는 사업 없이 분열 문제를 극복하지 못한 채 1931년 광주청년동맹은 해체되고 말았다. 청년 운동의 대상이 노동· 농민 청년으로 한정되었고, 독자적 청 년조직이 아닌 노동·농민조합의 한 부서로 편재되었기 때문에 이 시기 이후 청년 운동은 성립할 수 없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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