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0911
한자 朴東實
영어공식명칭 Park Dongsil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명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7년연표보기 - 박동실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9년~1912년 - 박동실 양명사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21년~1925년 - 박동실 광주협률사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30년대 - 박동실 광주권번 강사
활동 시기/일시 1930년대 중반 - 박동실 국악초당 강사
몰년 시기/일시 1968년 12월 4일연표보기 - 박동실 사망
출생지 전라남도 담양군 금성면 대판리
활동지 광주권번 - 광주광역시 동구 남동 21번지 지도보기
성격 판소리 명창
성별
본관 밀양
대표 경력 양명사 활동|광주협률사 활동|광주권번 강사|국악초당 강사

[정의]

근·현대 시기에 전라남도 광주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월북 판소리 명창.

[개설]

박동실(朴東實)[1897~1968]은 전라남도 담양군 금성면 대판리에 있는, 대대로 소리꾼을 업으로 삼았던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부모가 광주군 본촌면 용두리[현 광주광역시 북구 용두동]에 살다가 전라남도 담양군으로 주소를 옮겼기 때문에 박동실의 광주 출생설도 거론된다.

서편제 명창 배희근이 외조부이며, 부친 박장원과 동생 박영실도 판소리 명창으로 활동하였다. 부친 박장원은 동편제 명창 송우룡의 제자이다. 박동실은 9세 때 부친 박장원에게 소리를 배우면서 입문하였고, 외조부 배희근의 제자인 김재관에게 본격적인 소리 수업을 받았다.

[활동 사항]

오늘날 알려진 박동실의 소리는 서편제 광주소리라고 불린다. 서편제 광주소리는 ‘이날치-김채만-박동실’로 이어지는 맥을 형성하고 있다. 박동실이 김채만(金采萬)[1865~1911]에게 학습한 시기는 김채만이 광주 속골로 낙향한 1906년 이후부터 김채만이 사망한 1911년 사이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양명사 활동 시기[1909~1912], 광주협률사 재건 시기[1921~1925]에 김채만의 제자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김채만의 소리를 지속적으로 학습·교류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박동실의 소리를 서편제 광주소리라고 지칭하는 까닭은 김채만의 제자들과는 구별되는 소리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박동실이 소리의 기반을 부친의 동편제 소리로 닦았고 광주협률사 활동으로 다양한 소리제를 접하면서 새로운 자신의 소리제를 만들어 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전후로는 창작 판소리 열사가류(烈士歌流)를 보급하여 시대의 목소리를 담은 판소리를 널리 알렸다.

박동실은 담양 지실의 국악초당과 광주권번을 오가며 지역의 소리꾼들을 많이 육성하였다. 대표적인 제자 중 남성 명창은 공기남·박후성·한승호·김동준·주강덕·공대일(孔大一)[1911~1990] 등이 있고, 여성 명창으로는 한애순(韓愛順)[1924~2014]·장옥순[장녹운]·장월중선·김소희·안채봉·박송희 등이 있다. 박동실이 교육자로서의 역량도 뛰어났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박동실은 월북을 선택하였다. 이로 인하여 박동실은 판소리사에서 조명받지 못하였으나,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월북 예술인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면서 박동실도 차츰 대외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광주 지역 판소리는 근·현대에 이르러 두드러지다가 박동실 때에 이르러 증폭되는 양상을 보인다. 근·현대 광주 지역에서 활동하거나, 또 활동하고 있는 명창들 중 상당수가 박동실과의 사승[師承: 스승에게 학문이나 기술 따위를 배워서 이어받음.] 관계를 형성하는 등 영향력이 지대하였다. 또한, 박동실의 월북으로 현대 광주 지역 판소리 전승이 암흑기를 맞이하는 위기도 겪었지만, 일제강점기라는 암흑기에 시대 정신을 투영한 창작 판소리의 보급은 오늘날에도 ‘창작 판소리’의 정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저술 및 작품]

박동실의 대표적인 소리는 「심청가」라고 할 수 있는데, 한애순을 통해 최근까지 전승되었으나 한애순 사망 후에는 전승 현황을 파악하기 어렵다. 일부 제자들에게 전승은 되었으나 ‘박동실-한애순’의 계보를 드러내며 제대로 활동하는 제자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박동실이 일제강점기 전후에 보급한 창작 판소리는 정순임 등의 명창을 통하여 지금도 활발히 전승되고 있다. 박동실의 창작 판소리로는 「이준 열사가」, 「안중근 열사가」, 「윤봉길 열사가」, 「유관순 열사가」 등의 열사가류와 「해방가」가 대표적이다.

[묘소]

박동실은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월북하였다. 1957년 공훈배우의 칭호를 받았고, 1961년 7월 예술인 최고의 영예인 인민배우가 되었다. 1968년 12월 4일 71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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