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경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1670
한자 喜慶樓
분야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수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451년연표보기 - 희경루 건립
개축|증축 시기/일시 1534년 - 희경루 재건
개축|증축 시기/일시 1686년 - 희경루 중수

[정의]

조선시대 광주읍성 객사 광산관 북쪽에 있었던 2층 누각.

[개설]

희경루, 공북루, 황화루, 봉생정, 제금루 등은 조선시대 광주읍성 관아의 누정이다.

[관련 기록]

희경루와 관련하여 신숙주(申叔舟)[1417~1475)가 1451년에 쓴 기문과 심언광(沈彦光)[1487~1540]이 1536년에 쓴 기문이 있으며, 허종(許琮), 성임(成任), 유순(柳洵), 송순(宋純), 임제(林悌), 임억령(林億齡) 등이 지은 5언시와 7언시가 전해지고 있다. 또 1567년 희경루에서 열린 연회를 그린 「희경루방회도(喜慶樓枋會圖)」가 있다.

[변천]

신숙주가 남긴 기(記)를 통해 희경루의 건립 시기를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1451년 광주목사로 부임한 안철석(安哲石)이 부임한 지 1년이 채 안 된 시점에 관유(觀遊)할 장소가 없어 지역 부로(父老)들과 논의한 후 공북(拱北)의 옛터에 지었다고 한다.

안철석 목사 때 지은 희경루는 불에 타 1534년 신한(申瀚)에 의해 다시 지어졌고, 1686년 이항(李恒)과 1866년 안응수(安膺壽)에 의해 중수되었다.

[형태]

신숙주가 남긴 기문에 의하면 “희경루 그 칸 수를 세어 보면 남북이 5칸이고, 동서가 4칸이니, 넓고 훌륭한 것이 우리나라에서 제일이었다. 동쪽으로는 큰길에 닿았고 서쪽으로는 긴 대밭을 굽어보며, 북쪽에는 연못을 파서 연꽃을 심고 동쪽에는 사장(射場)을 만들어 덕을 보는[觀德] 장소로 삼으니, 손님과 주인이 이제야 비로소 올라 쉬는 즐거움을 누리게 되었다. 이는 태수의 뜻을 고을의 백성이 이루어 놓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현황]

희경루는 소실되어 남아 있지 않았으나, 2023년 9월 20일 광주공원에 중건되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3.10.13 현행화 [현황] 희경루는 현재 소실되어 남아 있지 않다. → 희경루는 소실되어 남아 있지 않았으나 2023년 9월 20일 광주공원에 중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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