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명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1814
한자 鄭弘溟
영어공식명칭 Jeong Hong-myeong
이칭/별칭 자용(子容),기암(畸庵),기옹(畸翁),삼치(三癡)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홍창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82년연표보기 - 정홍명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96년 - 정홍명 구봉 송익필에게 수학
활동 시기/일시 1601년 - 정홍명 사계 김장생에게 수학
활동 시기/일시 1616년 - 정홍명 문과 급제 및 삭방(削榜)
활동 시기/일시 1623년 - 정홍명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 수찬(修撰) 등 역임
활동 시기/일시 1624년 - 정홍명 이괄(李适)의 난 때 인조를 공주까지 호종
활동 시기/일시 1624년 - 정홍명 정언(正言), 교리(校理), 헌납(獻納), 이조좌랑(吏曹佐郞) 등 역임
활동 시기/일시 1627년 - 정홍명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세자 호종
활동 시기/일시 1632년 - 정홍명 집의(執義)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33년 - 정홍명 김제군수(金堤郡守) 부임
활동 시기/일시 1643년 - 정홍명 대사성(大司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43년 - 정홍명 함양군수(咸陽郡守) 부임
몰년 시기/일시 1650년연표보기 - 정홍명 사망
추모 시기/일시 1711년 - 정홍명 시호 문정(文貞) 추증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영일(迎日)
대표 관직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

[정의]

조선 후기 예문관검열, 홍문관정자 등을 역임한 광주 지역 출신의 문신.

[가계]

정홍명(鄭弘溟)[1582~1650]의 본관은 영일(迎日)이며, 자는 자용(子容), 호는 기암(畸庵), 기옹(畸翁), 삼치(三癡)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정규(鄭潙), 할아버지는 정유침(鄭惟沉), 아버지는 송강 정철(鄭澈)이고, 어머니는 문화유씨(文化柳氏)이다. 정홍명은 부인을 셋 두었는데, 첫째 부인은 유대이(兪大頤)의 딸 기계유씨(杞溪兪氏), 둘째 부인은 윤정근(尹廷瑾)의 딸 남원윤씨(南原尹氏), 셋째 부인은 김공휘(金公輝)의 딸 광산김씨(光山金氏)이다.

[활동 사항]

정홍명은 어려서부터 송익필, 김장생 등 당대의 유명한 학자들에게서 수학하였고, 1616년(광해군 8)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곧바로 삭방(削榜)[과거 급제자의 명단에서 이름을 빼는 일]을 당해 고향에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였다. 정홍명은 인조반정 이후 인조의 중용을 받아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 수찬(修撰) 등에 임명되면서 중앙 정계에 등장하였다. 정홍명은 내·외직을 돌며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같은 국난을 당해서는 왕이나 세자를 호종하거나 의병을 모으기도 하였다. 그 후 정홍명은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이조좌랑(吏曹佐郞), 지제교(知製敎),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부제학(副提學)·대사성(大司成) 등 굵직굵직한 자리에 임명되었으나 대부분 고사하였고, 말년에도 조정의 부름을 지속적으로 받았으나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무리하였다.

『효종실록(孝宗實錄)』에는 정홍명의 졸기(卒記)가 짤막하게 있는데, “성품이 강직하고 남을 잘 인정하지 않았으며 술 마시기를 매우 좋아하였다. 문장은 넓고 풍부하였는데, 더욱 사부(詞賦)에 장점이 있었다.”라고 평하였다. 정홍명의 생애에는 아버지 정철의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정철은 서인(西人)의 영수로서 강경한 정치적 노선으로 인해 여러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어려움을 겪었는데, 그 여파가 정홍명에게까지 미쳤다. 정홍명의 청년 시절에 관한 기록이 많지 않은 것이나 관직에 나아가서도 계속해서 물러나고자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졸기에서도 보이듯이 정홍명은 문장으로 널리 이름을 알렸다.

[학문과 저술]

정홍명은 15세인 1596년(선조 29)에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에게 수학하였다. 그리고 20세인 1601년(선조 34)에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에게 수학하며 『주역(周易)』, 『근사록(近思錄)』 등을 배웠다. 박세채(朴世采)가 작성한 정홍명의 묘지명[「사헌부대사헌기암정공묘지명(司憲府大司憲畸庵鄭公墓誌銘)」]에 따르면, 김장생의 아들인 김집(金集)은 정홍명을 ‘국사(國士)’로 대우하였다고 한다.

정홍명의 저서로는 『기암집(畸庵集)』과 『기옹만필(畸翁漫筆)』이 있다. 『기암집』은 정홍명 사후에 아들 정이(鄭涖)가 유문을 정리하고 조카 정양(鄭瀁)이 주도하여 1653년(효종 4)에 간행한 목판본 문집으로, 1684년(숙종 10)에는 초간에서 누락된 글을 증보하여 다시 간행하였다. 『기옹만필』은 1643년(인조 21)에 필사 형태로 편찬된 것으로, 『기암집』과 더불어 『대동야승(大東野乘)』에 실려 있다. 격언, 고사, 역사, 문학, 정치 등 다양한 학문적 주제에 대한 정홍명의 견해를 담고 있다.

[상훈과 추모]

정홍명은 사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영의정(領議政)에 증직되었고, 1711년(숙종 37)에 ‘문정’이라는 시호를 추증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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