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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농공은행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2634
한자 光州農工銀行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이장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06년 6월연표보기 - 광주농공은행 설립
해체 시기/일시 1918년연표보기 - 광주농공은행 해체
최초 설립지 광주농공은행 - 광주광역시
성격 금융기관
설립자 대한제국 정부

[정의]

근대 광주 지역에 있었던 금융 기관.

[개설]

광주농공은행(光州農工銀行)은 농업과 공업 등 산업 부문에 대한 금융 지원을 목적으로 설립된 특수 은행으로서, 광주 지역에서 본격적인 근대 은행의 출현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설립 목적]

광주 지역의 농업과 공업 등 산업 부문에 대한 금융 지원 서비스를 위해 설립하였다.

[변천]

광주농공은행은 1906년 6월에 설립되었다. 서울을 시작으로 지방에 모두 11곳의 농공은행이 설립될 때 같이 설립되었다. 설립 뒤에 사세를 꾸준히 확장해 수년 만에 제주, 영산포, 벌교, 여수, 목포 등지에 지점을 냈다. 전국적으로 11개의 농공은행이 설립되었으나, 경영 부실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이유로 합병과 통합을 거치며 한호, 경상, 평안, 전주, 광주, 함경 등 6개 농공은행으로 줄었다. 광주농공은행은 1918년 폐업 때까지 굳건히 사세를 유지했던 은행 중 하나였다.

그러나 농공은행의 설립 시기가 을사늑약 직후였던 것을 반영하듯이 은행의 운영 방식이나 성격에도 이런 시대적 특성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은행 설립자는 명백히 대한제국 정부였고, 따라서 임원도 전부 한국인들로 임명되었다. 창립 당시 은행장은 박원규, 임원은 김형옥·이응일·김기창·최상진 등이었다. 그러나 은행의 실권은 전적으로 일본인이 장악하고 있었다.

식민 지배가 본격화되자 일제는 굳이 농공은행을 운영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농공은행을 대체할 새로운 은행으로 조선식산은행의 설립을 서둘렀고, 1918년 전국의 모든 농공은행을 모두 식산은행에 흡수하였다. 광주농공은행도 1918년 4월에 해체를 결정하고 지분을 모두 식산은행에 넘겼고, 본점 건물도 식산은행 광주지점으로 바뀌었다. 이후 식산은행 건물은 일제강점기 내내 광주우체국과 함께 식민 지배의 상징으로 충장로의 풍경을 지배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한국산업은행 광주지점으로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그 터에 유통점이 들어서 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농공은행은 손쉬운 돈벌이 수단인 상업 대출에만 주된 관심을 쏟았고, 주로 일본인 이주민을 대상으로 제공하였다. 농공은행이 일본인들의 사금고로 전락했다는 혹평을 받은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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