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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0038
한자 儒敎
영어공식명칭 Confucianism
이칭/별칭 유학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하창환

[정의]

경상북도 경산시에서 공자의 가르침을 신봉하여 이를 계승 및 실천하고자 하는 학문적 활동과 의례적 행위 일반.

[개설]

유교는 공자(孔子)가 춘추 시대의 혼란한 상황을 인(仁)과 예(禮)로써 극복하고자 창시하였다. 이후 중국의 여러 학자들이 공자의 사상을 계승하고, 이를 왕조의 치국(治國) 이념으로 활용함으로써 유교는 더욱 발전해 갔다. 한편, 유교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전파되어 사회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인접해 있었던 까닭에 삼국 시대 이전에 유교가 유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산 지역의 경우 고대 유교의 전개 양상을 상세히 보여주는 자료와 유적은 없으나, 경산과 깊은 연고를 가지고 있는 설총(薛聰)[655~?]의 활약을 통해 지역 내 유교의 유입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다.

중세 이후의 유교는 과거제의 실시와 지방 관학인 향교의 설립으로 그 저변이 더욱 확대될 수 있었다. 경산 지역에서도 허조(許稠)[1369~1439]와 같이 유교에 깊은 소양을 갖춘 명신(名臣)이 배출되었으며, 임진왜란 기간에는 많은 선비들이 의병을 일으켜 유교의 절의 정신을 실천하였다. 하지만 근대 이후 새로운 문물의 등장과 가치관의 변화에 따라 기존의 유교적 가치관은 그 권위를 잃게 되었다. 이에 경산 지역에서는 성균관유도회 산하 단체들이 주축이 되어 전통적인 유교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설총과 고대 경산의 유학]

경산 지역은 삼성현(三聖賢)의 고장이다. 세 성현은 세존(世尊) 이래 최고의 불교 학자로 명성을 얻은 원효(元曉)[617~686]와 원효의 아들 설총(薛聰)[655~?], 그리고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저자인 일연(一然)[1206~1289]이다. 이 가운데 유교와 관련된 인물은 바로 설총이다.

설총은 경사(經史)에 두루 달통하여 우리말로 구경(九經)을 읽고 풀이하였으며, 후생을 가르쳐 우리나라 유교의 종주(宗主)가 되었다. 1022년(현종 13) 설총에게는 큰 선비, 또는 유교를 널리 알린 사람이라는 뜻의 홍유후(弘儒侯)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고,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경산 지역은 우리나라 유교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일각에서는 경산 지역과 설총의 연관성이 부정되기도 한다. 설총의 아버지인 원효가 자인(慈仁) 출신인 것을 감안하면, 분명 설총은 경산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설총의 어머니가 요석공주이고, 설총은 월성(月城) 대궁(大宮)의 서편 문천(蚊川) 인근에 있는 요석궁(瑤石宮)에서 태어나 신라의 왕궁에서 성장하고 왕경에서 수학하였기 때문에 경주 인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다음의 두 가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나는 원효의 알려진 저작만 99부(部)에 240권인데, 배경이 되는 고향 자인 지역의 학문적 역량이 녹록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설총에 대한 경산 지역 사람들의 계승 의식이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지금의 경산시 여천동에는 설총의 유적이 있었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건물이 퇴락하자 지역 사람들은 지금의 경산시 남산면 하대리도동재(道東齋)라는 재사(齋舍)를 건립하였고, 설총에 대한 추모 의식을 이어오고 있다. 경산 지역 사람들은 원효에서부터 축적된 학문적 역량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유학의 종주인 설총이 배출되었다는 연원 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자긍심으로 지역의 유교 문화를 이루어 갔다.

[중세 경산 지역 유교 문화의 발전]

고대 유교는 수도를 중심으로 발전하였으며, 일부 지배층의 전유물이었다. 유교가 각 지역으로 전파된 것은 고려 시대 이후이다. 과거제가 실시됨에 따라 지방 세력의 자제를 중심으로 유교적 소양을 키워 나갔는데, 그 중심지는 지방 관학인 향교였다. 향교는 ‘일읍일교(一邑一校)’의 원칙하에 점진적으로 확산되며, 백성들의 교육과 교화를 담당하였다.

경산 지역에서 향교는 늦어도 고려 후기에 처음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전통 시대 경산 지역은 경산(慶山)·하양(河陽)·자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경산향교는 1390년(공양왕 2) 구교동(舊校洞)[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옥곡동]에 처음 건립되었다. 하양향교의 건립 시기는 정확하게 전해지지 않지만, 하양 허씨(河陽許氏)가 고려 후기 신흥 명문가였고, 조선 전기 정승을 지낸 허조(許稠)[1369~1439]가 하양 허씨 가문에서 배출된 점을 감안하면, 역시 늦어도 고려 후기에는 운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자인향교는 경주의 속현(屬縣)이었던 1562년(명종 17)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고려 공민왕 때 건립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경산 지역의 유교는 향교의 건립 이후 지역민에게 더욱 가까이 인식되었고, 명망을 갖춘 유학자들이 배출되었다.

경산 지역의 유학자 가운데 가장 먼저 주목되는 인물은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이다. 하양 지역 출신인 허조는 양촌(陽村) 권근(權近)에게서 수학하였으며, 1390년 과거에 급제하였다. 조선 건국 후 좌보궐(左補闕)과 봉상시승(奉常寺丞)으로 있으며, 예제(禮制)를 제도화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1397년에는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있으면서 석전(釋奠) 의식을 거행하였고, 1411년 예조참의(禮曹參議) 재임 중에는 학당을 세우고 조묘(祖廟)의 의례와 일반의 상제(喪制) 등을 법제화하는데 기여하였다. 세종 조에는 예조판서와 이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을 역임하면서 국정을 총괄함과 동시에 유교 문화를 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허조의 이력을 보면, 특히 예학(禮學)에 밝았던 학자였음을 알 수 있다. 허조의 학문에 영향을 받은 경산 지역의 유림들은 1684년(숙종 10) 허조의 업적을 기리고자 하양에 금호서원(琴湖書院)을 건립하였다.

자인 출신 인물 중에서는 성재(省齋) 최문병(崔文炳)[1557~1599]이 주목된다. 최문병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제자인 외숙 전경창(全慶昌)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전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가산을 털어 의병을 일으켰고, 자인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일본군의 침입으로부터 고을을 수호하였다. 또한, 동래에서 군량의 부족으로 곤경에 처한 명나라 군대를 위해 수백 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군량을 날라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전쟁이 끝난 후 여러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후학들은 이러한 행적과 정신을 기리고자 1786년 자인에 용계서원(龍溪書院)을 건립하였다.

경산 지역 출신의 선비 성재(成齋) 진섬(陳暹)[?~1592]은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정구의 제자 가운데에서도 공자의 수제자인 안회(顔回)와 같은 인물이라 평가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고산(孤山) 욱수동(旭水洞)의 망월산성(望月山城)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이후 영천성(永川城) 수복 전투를 앞두고 적정을 정탐하다가 일본군에게 공격을 당해 순절하였다.

허조·최문병·진섬은 옛 경산 지역을 대표하는 유학자이다. 경산 지역의 유학자 중 퇴계나 율곡(栗谷)처럼 큰 학단(學團)을 이끌었던 인물은 없다. 대신 중앙 정계에서 유교 보급을 위해 직접적으로 노력하거나 국난이 일어났을 때 몸소 유교의 절의 정신을 실천하였다. 이러한 실천 정신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등에 수록된 충신·효자·열녀 중 경산 지역 출신 인물은 적지 않은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근현대 경산 지역 유학의 변화와 과제]

개항 이후 유교는 새로운 문물과 가치관의 유입으로 점차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8·15광복과 함께 미군정이 실시되고, 서양의 선교사들로부터 보급된 기독교가 널리 전파되는 등 서양의 물질문명이 크게 확산되었는데, 이러한 흐름 속에서 시대적 변화에 따라 올바른 전통으로서 유교를 계승하려는 노력들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경산 지역의 유림들도 전통의 가치관인 유교를 계승·발전시키며, 유교의 현대화와 대중화를 위한 운동에 앞장섰다. 이를 실천한 대표적인 기관으로는 성균관유도회 산하 경산 지역 지부들과 담수회 경산지회가 있다. 가장 주목되는 단체는 바로 성균관유도회 하양지부로, 성균관유도회가 내분과 1961년 군사정권의 포고령으로 해체되자 1963년 독자적으로 성균관유도회를 결성하고 회칙을 만들어 유교 문화 계승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현대 유교는 급속한 사회 변화로 인한 새로운 가치관의 확산으로 과거의 권위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으며 계승·발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더구나 과거 유교 전통의 계승을 주도하였던 세력이 현재는 대부분 고령이므로 추진력을 갖기 쉽지 않은 실정이다. 따라서 새로운 세대에게 유교의 가치관을 알려주고 동참하게 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은 현재의 과제이다. 이는 비단 경산 지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유교 전반에 해당되는 과제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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