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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1430
한자 徐濂 孝子旌閭閣
영어공식명칭 Memorial Monument House for the Filial Piety of Seo Ryeom
이칭/별칭 서렴 효자각,서렴 정려각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대정길 52-7[대정동 652]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축|증축 시기/일시 1922년 - 서렴 효자정려각 중건
현 소재지 서렴 효자정려각 - 경상북도 경산시 대정길 52-7[대정동 652]지도보기
원소재지 서렴 효자정려각 - 경상북도 경산시 대정길 52-7[대정동 652]
성격 정려각
양식 홑처마 맞배지붕
정면 칸수 1칸
측면 칸수 1칸
소유자 서호규

[정의]

경상북도 경산시 대정동에 있는 일제 강점기 정려각.

[개설]

서렴 효자정려각은 조선 후기 경상도 자인현(慈仁縣) 출신의 효자인 서렴(徐濂)[1593~1662]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1922년 건립된 정려각이다. 서렴의 본관은 달성(達城)으로, 두 아우와 함께 어린 시절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아버지의 병이 위독해지자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였으며, 어머니가 병환에 들자 11년간 봉양하였다. 서렴이 세상을 떠난 후 고을 사람들이 포장(褒獎)을 청원하여 1718년(숙종 44) 정려가 내려졌고, 승훈랑(承訓郎)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증직되었다. 또한, 서렴의 집안 사람들은 복호(復戶)의 혜택을 입었다. 원래 서렴은 호가 없었는데, 고을 사람들에 의해 ‘겸와(謙窩)’라고 불렸다.

[위치]

경상북도 경산시 중방동의 경산네거리에서 경안로를 따라 북쪽의 대구광역시 방면으로 780m 가량 이동하면, 우측 편에 경산시 대정동을 가리키는 안내판이 나온다. 안내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대정길을 따라 다시 320m 정도 이동하면 대정동회관이 나오고, 여기서 북서쪽으로 난 길로 180m 가량 이동해서 마을을 지나치게 되면 오목천으로 합류하는 작은 하천과 다리를 만나게 된다. 서렴 효자정려각은 다리에서 동쪽으로 40m 가량 떨어진 천변에 북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변천]

1932년에 작성된 「겸와공정려중건기(謙窩公旌閭重建記)」에 따르면 1922년 후손 서호규(徐浩奎)가 족인(族人) 서병기(徐炳冀)와 더불어 현재의 정려각을 중건하였다고 한다. 중건기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이전에도 정려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그 이력은 명확하지 않다. 다만, 서렴 효자정려각 내부에 걸려 있는 정려판에 ‘효자 증 승훈랑 의금부도사 서렴지려 경자 십일월 일(孝子 贈 承訓郞 義禁府都事 徐濂之閭 庚子 十一月 日)’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1720년에 정려판이 제작된 이후 처음 정려각이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형태]

서렴 효자정려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적벽돌을 사용하여 벽면을 꾸렸다. 측면에 풍판(風板)을 달아 놓았으며, 정면에 살창을 설치하여 내부를 볼 수 있게 하였다.

[현황]

서렴 효자정려각 주위에는 시멘트 담장이 둘러져 있으며, 정면에는 철제로 된 울타리와 함께 중건기를 번역한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내부에는 정려판과 「겸와공정려중건기」가 걸려 있는데, 중건기는 마모가 심해 작성자 등 일부 글자가 판독되지 않는다.

[의의와 평가]

서렴 효자정려각은 경산 지역의 효 문화 계승 의식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규모에 건물 내 정려판만 걸어 놓은 것은 근대 이후 건립된 정려각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단청이 단순하며,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같은 시기 정려각에 비해 소박한 느낌을 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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