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0013
한자 韓將軍-忠義-追慕-慶山慈仁端午祭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서부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창언

[정의]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경산자인단오제의 전승과 보존에 관한 이야기.

[개설]

경산자인단오제는 자인 지역에 침입한 왜의 무리를 물리친 한장군(韓將軍)이라는 인물과 관련된 설화에 기초하고 있다. 한장군은 누이와 함께 자인의 도천산에 은거하며 노략질을 일삼던 왜의 무리를 꾀어내어 물리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경산자인단오제는 예로부터 한장군의 승전을 기념하고, 한장군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서 사당을 짓고 단오에 제사를 지냈던 것에서부터 유래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자인현의 향리층이 주관하는 고을축제의 형태로 전승되어 왔으나, 일제 강점기에는 왜의 무리를 물리친 한장군에 대한 제의의 상징성으로 인해 중단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단오제의 복원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 1970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한장군놀이’로 국무총리상을 수상하였으며, 이듬해인 1971년 ‘한장군놀이’가 국가무형문화재 44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자인면계정숲에 한장군묘를 조성하고 기념비와 진충묘를 건립하였으며, 2007년에는 ‘한장군놀이’에서 ‘경산자인단오제’로 개칭되었다.

근래 경산자인단오제보존회를 중심으로 단오제의 복원을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여 왔으며, 그 결과 경산자인단오제는 한묘대제, 호장행렬, 단오굿, 여원무, 팔광대로 구성되어 매년 단오를 전후하여 여러 행사를 곁들여 지역축제로 전승되고 있다.

[경산자인단오제의 주인공, 한장군]

‘한장군 설화’에 등장하는 한장군의 존재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자인 지역에 출몰한 왜의 무리를 여원무로 꾀어 격퇴한 설화의 내용과 임진왜란 당시 자인의 의병장이었던 최문병의 문집 『성재실기(省齋實紀)』에서 한장군을 기리는 시를 고려할 때, 왜구의 폐해가 심했던 신라 시대나 고려 시대의 인물로 추정되고 있다. 한장군설화는 지역민들의 구전과 옛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 19세기에 편찬된 『자인현읍지(慈仁縣邑誌)』, 『옥산문첩(玉山文牒)』, 『경상도자인현일록(慶尙道慈仁縣日錄)』 등의 문헌에 소개된 설화의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한장군은 자인의 도천산에 은거하며 노략질을 일삼던 왜의 무리를 물리치기 위해서 여장을 한 채 여동생과 함께 색지로 꽃을 만들어 늘여놓은 관을 쓰고 산 밑의 버들못에서 여원무를 추어 꾀어내었으며, 여원무와 잡희를 넋놓고 구경하던 왜의 무리를 광대들과 함께 검을 휘둘러 무찔렀다. 당시 버들못에서 검을 휘두른 흔적이 남은 바위를 참왜석(斬倭石)[검흔석(劍痕石)]이라 하며, 매년 이날 못이 붉게 물들었다. 이에 지역민들은 한장군의 충의를 기려 신사를 건립하여, 매년 단오에 ‘장산사명기(獐山司命旗)’를 세우고 사모관대를 갖춘 호장의 주재로 제사를 지내왔다. 이때 여장을 한 사내 아이 두 명이 여원무를 추고, 광대들이 잡희를 연출하였다. 이와 더불어 자인현에 소재한 여러 마을에서도 한장군과 누이의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왔다. 이상의 한장군설화를 통해 자인 지역에서 한장군의 충의를 기리기 위한 제의를 겸한 고을축제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조선시대 동안 전승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동안에는 왜의 무리를 물리친 설화에 기초한 한장군을 기리는 행사가 탄압의 대상이 되어, 사당이 훼철되고 제의는 물론 놀이도 중단되었다. 한동안 중단되었던 한장군을 기리는 행사는 1950년대 중반 김용호와 김도근을 비롯한 지역민들의 노력으로 한차례 연행이 이루어졌으며, 1960년대 지역사회에서 복원을 위한 노력이 본격화되었다. 그 결과 1970년 전국문화예술공연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했고, 이듬해에는 ‘한장군놀이’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를 계기로 보존회가 결성되었으며, 이후 체계적인 보존과 전승을 위한 노력이 지속되어 왔다. 2007년에는 경산자인단오제로 개칭되었고, 다양한 행사를 곁들인 지역의 대표적인 축제가 되었다. 또한 경산자인단오제의 온전한 보존과 전승을 위해서 학술제 개최와 전승 기반의 확충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경산자인단오제의 구성]

한장군놀이가 경산자인단오제로 거듭나면서 본격화된 여러 차례의 학술제를 통해서 단오제의 절차상의 보완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근래 경산자인단오제는 신주 빚기에서 송신제에 이르기까지 한 달여 기간에 걸쳐 진행되고 있다. 예로부터 전승된 한묘제와 각종 연행은 모든 행사의 마지막 날인 단옷날에 집중되지만, 다양한 연행을 포함한 지역축제를 겸한 본 행사에만 사나흘이 소요되고 있다. 신주 빚기에서부터 자인 지역의 여러 마을에 소재한 한당 제의를 비롯한 산신제 유제지제, 도당당산제는 본 행사에 앞서 진행되고 있다.

본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단오 전 이삼일은 단오와 관련되어 민간에서 전승된 씨름, 그네뛰기, 창포머리감기 등의 행사를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서 전승된 무형문화재의 연행과 곡예단, 뮤지컬 등 다양한 성격의 예술공연이 진행되고 있다. 마지막 날인 단옷날에는 경산자인단오제의 지정 문화재 행사를 중심으로 역시 다양한 공연이 진행되고 있다.

문화재행사는 한장군대제, 호장행렬, 여원무, 자인팔광대, 단오굿으로 진행되며, 송신제를 마지막으로 모든 행사를 마무리한다. 문화재행사와 더불어 단옷날에는 경산 지역에서 전승된 무형문화재인 계정들소리보인농악의 공연도 병행되고 있다. 이처럼 신주 빚기에서부터 송신제에 이르기까지 한 달여에 걸쳐 진행되는 경산자인단오제는 강릉단오제와 더불어 단오에 개최되는 대표적인 지역축제가 되었다.

[경산자인단오제의 성격과 의의]

전통사회에서 단오, 한식, 추석과 더불어 중요한 명절이었다. 단오는 농작물의 성장을 기원하는 마을 단위의 풍속으로 전승되거나, 고을을 단위로 여러 가지 행사를 곁들인 축제적 성격으로 전승되었다. 고을축제 형태의 단오는 관에서 주도하는 유교적 방식의 제의와 단오굿 그리고 탈놀이를 비롯한 개인 및 집단적 놀이가 망라된 읍치제의적 형태로 전승되었다. 읍치제의적 성격의 단오제는 유교식 제의와 때로 별신굿 형태의 무속식 제의를 포함하여 탈놀이 등 다양한 방식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고을축제의 성격을 띠었다.

경산자인단오제는 강릉단오제, 영산단오제와 함께 현재까지 전승된 대표적인 읍치제의적 성격을 지닌 단오제이다. 읍치제의적 성격의 단오제는 읍치에서 관 주도의 제의와는 별도의 형태로 지냈던 제의가 병존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두 가지 형태의 제의가 통합되기도 했다는 사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 대체로 굿과 놀이를 동반한 읍치제의적 성격의 제의는 대체로 지역의 향리집단이 주도했다. 이러한 읍치제의 성격의 고을 단위의 단오제는 지역사회의 결속과 정치사회적 관계의 재생산의 기제로서 의미를 지닌다.

경산자인단오제의 경우 오랫동안 자인 지역 사람들의 염원이었던 복현을 위한 운동과 지역의 여러 마을에서 한당제를 지낸다는 점에서 이러한 성격이 두드러짐을 알 수 있다. 자인 지역은 고려 시대 경주부에 속한 속읍이 된 이후 조선 시대에도 인접한 경산과 하양이 독립현이 되었으나 자인현은 속읍으로 남았다. 이로 인한 폐해가 심해지면서 독립현으로서 자립을 모색하게 되었다. 16~17세기에 걸쳐 전개되었던 자인현민의 복현을 위한 노력에서 주목할 것은 지역민들의 강한 결속력이 복현의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는 점이다. 또한 자인현 복현 운동을 위한 지역민의 염원과 실천은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자인현 지역민들이 공유하는 역사와 문화 그리고 지역적 정체성의 핵심적인 구성부분으로 남게 되었다. 이를 통해 지역사회 결속의 상징재로서 경산자인단오제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다. 그 결과 자인현 지역에 해당되었던 현재의 자인면, 용성면, 진량읍에 소재한 여러 마을에서 한당제가 전승되고 있다.

이처럼 경산자인단오제와 같은 읍치제의는 고을 수호신에 대한 신앙적 의미 외에 다양한 의미를 반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 있다. 이런 성격의 제의는 신분제에 기초한 비대칭적 사회구조의 지속과 관련하여 신앙적 의미 이외에 지역사회의 다양한 부면에서 전개될 수 있는 정치사회적 의미를 반영하였다. 읍치제의는 제의가 지니는 종교 신앙적 공간에 반영된 향촌사회의 구조와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도 제공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읍치제의로서 단오제는 고을을 단위로 전개된 지역의 역사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고을에서 행해진 제의의 구조와 내용을 통해 지역사회의 사회과정이나 시대별 지역민의 인식과 실천을 살피는 데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즉, 한장군과 관련된 설화와 신앙에 대한 지역민의 깊은 인식을 이해할 수 있다.

한장군이나 관련 설화의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자인현 지역민의 뿌리 깊은 공유된 인식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인 고을의 수호신으로서 한장군에 대한 신앙은 자인현의 복현 운동과 관련하여 강화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측면에서 자인현의 ‘한장군 신앙’은 지역민의 상황개선을 지향하는 공유된 염원과 자긍심의 상징적 의미를 반영하고 있다. 이처럼 경산자인단오제 역시 읍치제의의 관점에서 심층적으로 접근할 때,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실체적 접근과 나아가 이를 통한 경산자인단오제의 복원과 바람직한 전승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경산자인단오제의 미래]

경산자인단오제는 한장군설화, 여원무, 호장굿, 자인팔광대, 단오굿 등 지역성, 역사성, 예술성을 반영한 제의와 연행의 구성을 잘 갖춘 문화재로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또한 단오날 읍치에서 향리주도의 굿과 놀이가 연행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적어도 고려 시대부터 존속한 향리주도의 제의가 관 주도의 제의와 병존했다는 것과 호장굿이 포함된 구성과 조선 후기 동안의 각종 기록을 통해 전형적인 읍치제의적 성격의 단오제라는 역사문화적 의미도 찾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강릉단오제의 경우처럼 세계인이 공유하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경산자인단오제보존회에서는 여러 차례 학술대회를 개최하여 단오제의 복원에 성과를 이루었다. 그 결과 주요 제의와 연행뿐만 아니라, 수 십 가지의 부대행사를 곁들여 한 달가량의 일정을 진행함으로써 강릉단오제에 못지않은 성대한 지역축제가 되었다. 이는 신주 빚기에서부터 송신제에 이르기까지 단오제의 주요 구성 부분의 연계성을 고려한 복원의 결과이다. 그럼에도 경산자인단오제의 주요 제의와 연행에 대한 학계의 논의는 여전히 몇 가지 측면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하고 시급히 진행해야할 과제는 경산자인단오제의 온존한 복원을 위한 노력이다. 고증과 복원은 제의와 연행뿐만 아니라, 관련 유적의 복원을 통해 경산자인단오제의 온존한 복원을 지향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경산자인단오제의 주요 유적 가운데 하나인 매립된 버들못의 복원도 장기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경산시 용성면가척리대종리, 진량읍 마곡리, 자인면 원당리 등 네 곳의 제당에서 전승되는 한당제 외에도 현재 중단된 한당제에 대한 검토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경산자인단오제의 온전한 복원과 바람직한 전승을 위한 방향을 설정하고 실천 방안을 제시할 수 있는 학계와 경산자인단오제 관련 단체 그리고 지자체의 관련 부서장 등으로 구성된 상설위원회의 운영과 전승 기반의 확충이 필요하다. 그리고 경산자인단오제의 복원, 전승, 행사 등의 분야를 전담하는 기구를 설립하여 역할분담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경산자인단오제의 온전한 복원과 전승 기반의 확충을 통해서 경산자인단오제의 세계화를 지향해야 한다. 한장군설화에 기초한 독특한 제의와 의례를 겸한 경산자인단오제의 무형유산으로서의 가치는 무한하다. 지역적이고 예술적인 고유성을 갖춘 경산자인단오제의 가치를 세계인이 함께 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경산자인단오제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다면 지역민의 자긍심 고취는 물론 지역에 미치는 긍정적인 효과는 엄청날 것으로 예상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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