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0621
한자 慶州 金氏
영어공식명칭 Gyeongju Kim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임기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본관 경주 - 경상북도 경주시
성씨 시조 김알지

[정의]

김알지를 시조로 하는 경상북도 경산시의 세거 성씨.

[개설]

경주 김씨는 김알지(金閼智)를 시조로 하고, 경순왕을 중시조로 하는 경산 지역의 세거 성씨이다. 경산 지역에 세거하는 경주 김씨의 입향조와 입향 경위는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연원]

경주 김씨의 본관인 경주는 경상북도 남동부에 자리한 지역으로, 고대 국가 신라의 수도였다. 신라는 기원전 57년에 경주 지역에서 6촌이 연합하여 탄생하였으며, 수도인 경주는 ‘금성(金城)’으로 불렸다. ‘경주’라는 명칭은 935년(태조 18)에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면서 처음 생겨났다. 이후 987년(성종 6)에 동경(東京)으로 개칭하였고, 여러 차례 변천을 거듭하다 1308년(충렬왕 34) 계림부(鷄林府)로 고쳤다. 조선 건국 후 1413년(태종 13)에 계림부를 경주부(慶州府)로 개칭하면서 ‘경주’라는 이름을 다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1895년(고종 32) 경주군으로 개편되었고, 1955년에 경주시로 승격되었다.

경주 김씨는 금궤에서 태어났다고 전하는 신라 김씨 왕가의 시조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를 시조로 한다. 경주 김씨는 김알지의 7세손 미추(味鄒)가 왕위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하여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까지 38명의 왕을 배출하였다. 경주 김씨는 분파와 지파가 수십 개에 이르는데, 경순왕의 셋째 아들 영분공(永芬公) 김명종(金鳴鐘)과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을 일세조로 하는 계통이 대표적이다. 영분공파조인 김명종은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한 후 경주군(慶州君)에 봉하여졌다.

[입향 경위]

경주 김씨의 경산 지역 입향 경위는 현재 분명하게 알 수 없으며, 인구가 많아 단일한 입향조도 확인하기 어렵다.

[현황]

경주 김씨는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자료에 의하면 경산시에 9,775명이 거주하고 있다.

[관련 유적]

경주 김씨 관련 유적으로 경산시에 남아 있는 것은 영사재(永思齋)와 김두범 효자각 등이 있다. 영사재는 경상북도 경산시 진량읍 북2리에 있는 경주 김씨 재실이다. 경주 김씨 입향조인 김세관(金世觀)을 추모하기 위해 1960년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1991년 남향이던 건물을 서향으로 바꾸어 현재의 장소에 재건하였다. 전면에는 3칸 규모의 산형 대문을 세웠으며, 주위에는 기와를 얹은 블록 담장을 둘렀다. 재실은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지붕 기와 건물이다.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 1칸씩을 둔 중당협실형이다.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고, 툇간 전면에는 유리 창문을 설치하였다.

김두범 효자각은 경산시 와촌면 음양리 544에 있으며, 율은(栗隱) 김두범(金斗範)[1823~1895]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효자각이다. 경주 김씨 문중에서 1938년 처음 건립하였으며, 1966년에 효자비와 비각을 새로 세웠다. 비각은 단칸 규모의 맞배지붕이며, 비각 주위에는 토석 담장을 둘렀다. 정면에는 작은 사주문이 있다. 효자각 내부에는 비대석과 비신이 있으며, 비 전면에는 해서체로 ‘효자김두범지비(孝子金斗範之碑)’라고 음각되어 있다. 김두범은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하여 노환으로 눕게 된 아버지를 위해 약탕을 끓여 올리며 정화수를 떠 놓고 쾌유를 빌었다. 또 위급할 때에는 손가락을 끊어 피를 마시게 하여 목숨을 구하였다고도 한다. 고을에서 김두범의 효행을 관청과 어사에게 알려 포상을 받으려 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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