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821
한자 安在瑩
영어공식명칭 An Jaehyeong
이칭/별칭 희숙,도남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여항면 외암리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장혜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2년 6월 28일연표보기 - 안재형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 - 안재형 함안읍 만세 운동 주도
몰년 시기/일시 1935년 5월 9일연표보기 - 안재형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7년 - 안재형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1년 - 안재형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 - 안재형 함안읍 만세 운동 주도
출생지 경상남도 함안군 여항면 외암리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함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안재형(安在瑩)[1882~1935]은 자는 희숙, 호는 도남이다. 아들 안인호(安寅鎬), 안정호(安丁鎬)와 3녀가 있다. 특히 장남 안인호는 함안 독립 유공자 유족회 대표로 활동하였고, 『함안 3·1 독립운동사 편찬 자료』를 펴내어 함안 독립 운동사 정립에 이바지하였다.

[활동 사항]

안재형은 1882년 6월 28일 함안군 여항면 외암리에서 태어났다. 1910년 한일 병합이 되자 상소문을 올렸고, 고종 서거 당시에 “나라가 망하고 임금마저 별세한 지금 내가 산들 무엇을 하겠는가”라며 자결을 시도하였다. 고종의 장례식에 다녀온 안재휘(安在輝)에게 서울의 의거 소식을 전해 듣고 함안읍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함안읍 만세 운동은 고종의 장례식과 독립 선언식에 참여하고 귀향한 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이찬영(李讚榮)·조병흠(趙丙欽)·박건병(朴建秉)·강기수(姜琪秀)·한관렬(韓灌烈) 등이 계획하였다. 함안읍 만세 운동의 실질적 지도자는 이희석(李喜錫)으로, 안지호(安知鎬)와 의거를 준비하였다. 3월 15일 동지들이 협의한 후 조병흠·한관렬 등이 독립 선언서를 인쇄하고 한종순은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박노일(朴魯一)·김상집(金祥集)·조병대·백낙삼(白樂三)·안갑중 등은 인근의 군중을 동원하였다.

함안 장날이던 1919년 3월 19일 오후 1시경 비봉산에서 고천제를 올리는 것으로 시위는 시작되었다. 오후 2시경 이희석이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고 3,000여 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군중은 함안 경찰 주재소를 습격하고 또한 우체국, 함안 심상 소학교, 함안 공립 보통 소학교, 함안 공립 보통학교, 등기소 등도 공격하였다. 군중은 마산 경찰 서장 기타무라[北村]와 함안 경찰서 순사 부장 오하야시[大林]를 붙잡아 독립 만세를 부르도록 하였다. 함안읍 만세 운동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진행된 대규모 의거이었다. 이 일로 마산 지방 법원 원심에 회부된 사람만 63명이었다. 이 수치는 단일 시위 운동으로는 다른 의거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안재형함안읍 만세 운동 당시 검거되어 부산 지방 법원 마산 지청에서 징역 3년 형을 선고 받았다. 판결 때 안재형은 군중의 선두에서 함안 경찰관 주재소와 등기소 등을 습격하고 기물을 파괴하였다는 증언이 있었다. 법원에서 “우리는 4,000년의 긴 역사를 가진 예의의 백성인데 너희들에게 개, 돼지의 대접을 받은 지가 10년이나 되었다. 우리 2,000만 민족의 피가 끓고 있는데 대한 독립을 외치는 사람이 어찌 나 한 사람뿐이겠는가? 나는 한 번 죽으면 그만이다”라고 소리 쳤다고 한다. 석방된 후에도 신간회 등의 독립 운동 단체에 가입하여 광복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1935년 5월 9일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1977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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