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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만의 오래된 해수욕장, 제부도 모래해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002
한자 京畿灣-海水浴場濟扶島-海邊
분야 지리/자연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제부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편성철

[정의]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현존하는 경기만의 가장 오래된 제부도 해수욕장에 대한 이야기.

[제부도의 갯길]

제부도는 1950년대까지 섬이었다. 하루에 두 번씩 갯벌 위로 서신면 제부리송교리를 연결하는 길인 ‘웃감’이 드러나기는 했지만 열두 고랑으로 불리는 여러 개의 갯골을 걸어가는 것은 주민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물때와 함께 드러나는 갯길은 외지인들에게 매력적인 볼거리였겠지만 주민들에게는 고통의 길이었다. 갯길을 통해서 드나들 수 있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들 수 있을 정도의 물자뿐이었다. 무겁고 많은 양의 물자가 오가기 위해서는 송산면 마산포나 인천에서 배를 이용해야 했다.

‘모세의 기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갯길을 화성에서는 ‘감’이라고 부른다. 제부도에는 두 개의 감이 있는데, 북쪽에 있는 감을 ‘웃감’, 남쪽에 있는 감을 ‘아랫감’이라고 부른다. 제부도의 남쪽 마약에서 서신면 살고지를 연결하는 것이 아랫감이고, 현재의 자동차 도로가 포장된 곳이 웃감이다.

[치유의 섬, 제부도]

제부도 해수욕장은 자연발생한 유원지로 주민들이 ‘뒷장숲’이라고 부르는 지역에 모래가 쌓여 해수욕장으로 이용해왔다. 1960년대 중반 경기지역 해수욕장은 인천의 묘도해수욕장[묘도유원지, 현재 폐쇄], 송도해수욕장[송도유원지, 현재 폐쇄]과 제부도 해수욕장이 있었다.

국토지리정보원에서 공개한 지도에는 1970년대부터 제부도에 해수욕장이라는 표기가 등장한다. 제부도가 고향인 최석만[1956년생, 남]에 따르면 초등학교 3학년 때 전학을 갔는데, 그때 반 친구들에게 제부도를 소개하면서 지도 속 해수욕장이 있는 곳이라고 소개를 했다고 한다. ‘뒷장숲’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해수욕장 배후에 숲이 있어 그늘을 제공하였다.

당시 제부도는 불편했지만 웃감을 통해서 육지를 오갈 수 있었고, 여름이 되면 정기적으로 운행하는 배편도 있어 다른 섬에 비해 출입이 용이했다. 그래서 외지에서 사람들이 들어왔고, 폐결핵 환자들이 요양차 제부도를 찾아 민박집에서 숙식을 해결하기도 했다.

관광객이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전문 숙박시설이나 음식점이 없어 민박집에서 숙식하거나 텐트를 가져와 숙박을 해결하였다. 민박이라고 하지만 본격적인 사업이라기보다는 단골처럼 주기적으로 방문하고, 손님이 사랑방에 머물면서 주민들의 일상을 공유하였다.

[제부도해수욕장, 도로가 만들어지다.]

1969년 겨울에 시작해 해를 넘겨 치로사업(治路事業)이 시작되었다. 웃감에 자갈을 부어 길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갈을 부어도 갯벌에 가라앉거나 조류에 휩쓸려갔다. 그러나 이전에 비해 통행 가능한 시간이 조금 늘었다.

1972년 『매일경제』와 1975년 『동아일보』 기사에는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이 제부도에 길을 만들기 위해 봉사활동을 한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주민들은 성균관대학교 학생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기억을 하고 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 텐트를 치고 지내면 리어카를 끌거나 등짐을 져 돌을 옮긴 것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돌길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돌길은 차량은 물론 리어카도 지날 수 없고 지게만 메고 다닐 수 있었지만 장화를 신지 않아도 갯벌에 빠지지 않았다. 길을 계속해서 보강하고 다져 1970년대 후반이 되면 경운기나 오토바이가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도로 사정이 나아지면서 주민들의 편의가 늘어나고 제부도를 찾는 관광객들도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서신면에서 배낭을 메고 들어오는 관광객들은 민박을 이용하였다. 자연스럽게 주민들도 농한기 부업으로 민박집을 운영하였다. 최석만의 집도 남는 방을 모두 민박집으로 운영했다. 어릴 적 기억에 의하면 젊은 여자들이 수영복을 입고 돌아다니고, 두레박으로 물을 퍼서 씻고 있으면 “이놈의 지지배들 어디서 옷 벗고 있냐”라고 동네 할아버지들이 소리를 쳤고 젊은 여자들은 오히려 재미있다면서 일부러 할아버지들을 놀렸다고 한다.

정부에서도 화장실 개량사업 등을 지원해 주면서 여름 한철이지만 제부도의 민박업은 주민들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수익금을 바탕으로 자식들을 수원이나 서울로 유학 보내기도 하였다.

[제부도해수욕장, 전기가 들어오다.]

주민들의 부업처럼 운영되던 민박은 1980년대 초반부터 횟집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전환점을 맞이한다. 변화의 원인은 도로의 포장과 전기의 사용이다. 1980년대 제부도에는 송전탑을 통해 전기가 들어오지 못했다. 제부도에 거주하는 주민의 수가 적어 철탑을 세우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송전탑이 세워져 전기가 들어온 것은 1995년인데, 이전에는 발전기를 사용하였다. 가정집에 가장 먼저 발전기를 설치한 곳은 최석용의 집이었다. 최석용이 중학교 2학년 때 나이 차이가 많은 나는 큰형이 청계천에서 2㎾ 용량의 이동식 발전기를 사 왔다. 냉장고, 마루의 전깃불, 텔레비전을 사용했는데 이웃들이 일정 금액을 내고 전기를 나눠쓰자고 해서 발전기 한 대로 안동네 24가구가 전기를 사용했다.

그 후 제부분교 근처의 가정에서도 발전기를 들여놓았다. 이렇게 두 대의 발전기가 있었는데, 하루에 80L의 기름을 사용했다. 3년 정도 발전기를 사용했는데, 발전기용으로 사용할 기름을 배로 운반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라 군부대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 결과 군의 지원으로 30㎾의 발전기가 들어오고, 운영을 지원해 주기도 했다.

발전기는 일몰부터 자정까지 보통 4시간에서 6시간을 가동했다. 발전기는 계속 교체되었는데 그 용량이 60㎾까지 늘었다. 횟집들이 들어선 상가에서는 전기시설이 많아지면서 자체적으로 발전기를 돌렸다. 이러한 발전기를 이용한 전기 생산은 1995년 송전탑이 들어서면서 끝나게 되었다.

횟집에서는 냉장고를 이용하기 위해서 전기가 필수였다. 군부대에서 지원하는 발전기는 자정이 되면서 끊어졌다. 전기를 끊을 시간이 되면 관리자가 스위치처럼 발전기를 껐다 켜면 집에 있는 전등도 깜박이는데 이 신호가 전기가 곧 끊어진다는 신호이다. 이 신호가 오면 횟집에서는 자가발전기로 교체를 해야 하는데 잠시 졸기라도 해서 발전기를 교체하지 못하면 수족관의 물고기는 죽고 냉장고 안에 있던 물품도 상하게 되었다.

주민들과 상가연합회에서 화성시에 지속적으로 송전탑 설치를 요청하면서 1994년 송전탑 공사를 시작해 1995년 10월 27일 110V 전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송전탑이 세워지면서 1996년에는 놀이공원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횟집은 1980년대 초반에 생겼다. 제부도의 첫 횟집은 수원시 매교동에서 일식집을 하던 이성락이 제부분교에서 근무하던 선생님의 권유로 제부도에 들어오게 된다. 처음 들어왔을 때에는 조립식 건물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1980년대 초 조립식 얇은 패널이 생산 유통되기 시작했는데 제부도에도 이를 이용해 경량 구조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당시 제부도의 도로는 포장상태가 좋지 않아 육지를 통해서 건축자재가 들어오기 힘들었으며 배를 통해서 운반해야 했는데 이것은 많은 비용이 들었다. 그런데 가벼운 자재가 생산되면서 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 그 결과 횟집이 만들어지고 동시에 해안가에는 20동이 넘는 전문적인 민박집이 만들어지게 된다. 그로 인해 마을 주민들이 자신의 집과 공간을 공유하는 민박은 도태되기 시작한다.

서신면 송교리와 연결된 바닷길, 웃감에 자동차가 통행할 수 있게 된 시기는 1980년대 중반이었다. 1985년에서 1987년 사이 모래, 자갈, 골재 등을 계속 쏟아부어 비로소 차량이 오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시멘트 포장도 되지 않은 도로는 중간중간 패인 곳도 많았고 차량의 바퀴가 바닷물에 반쯤은 잠긴 채 운행해야 했다.

최병천은 서신면 소재지와 제부도를 오가는 버스를 운영하기도 했다. 1984년 제대를 하고 1985년 제부도로 돌아왔다. 당시 제부도 조한창 이장이 버스 한 대를 지원받았는데 제부도에서 면허증을 가진 사람이 최병천이 유일했다. 자연스럽게 최병천이 맡아 운행했는데 지금에 비해 자동차의 성능도 떨어졌고 무엇보다도 웃감을 오가는 것만으로도 많은 정비 소요가 발생했다.

바닷물에 노출된 하부 스프링이 끓어지거나 녹이 쓸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곤 했다. 차량정비소에서 오지 말라고 말할 정도로 정비가 잦았다. 면 소재지인 서신면 매화리제부도를 오가는데 주로 사강장을 이용하거나 수원이나 서울까지 가기 위해 면 소재지를 경유하는 이들이 이용하였다.

마을버스가 운행되면서 관광객들의 유입도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처음에는 주민들만 이용하는 버스였지만 입소문이 나면서 관광객도 이용하게 되었다. 버스는 1989년 웃감이 시멘트로 포장되는 해까지 운행되었다. 이어서 화성시에서 버스 구입비의 50%를 보조받아 25인승 버스를 구입했다.

시멘트 포장길이 개통되면서 1990년부터 1993년까지 관광객들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관광객이 너무 많아 버스 문을 닫지 못하고 출발할 정도였다. 편도 이용요금이 1,000원으로 당시 시내버스 요금보다도 비쌌지만 웃감길을 지나야 하고 비포장도로도 많아 정비비가 많이 들어 시에서도 허가를 내줬다.

[제부도해수욕장, 관광산업의 미래가 되다]

최근 들어 도로와 교통이 발달하면서 서울 근교의 해수욕장이라는 지형적 이점은 퇴색되었다. 또한 교통이 좋아졌다는 것은 접근성이 좋았다는 의미인 동시에 관광객이 숙박을 하지 않고 갯벌체험만 하거나 바다만 보고 돌아가는 경우가 많아져 숙박업소에는 불리하게 작용한다.

또한 관광객들의 소비 유형 변화에 맞춰 제부도의 상권도 재편성되고 있다. 많은 바닷가가 그러했듯이 제부도도 60여 곳의 횟집이 있을 정도로 횟집 일변도의 상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직종의 사업장이 포화상태에 이르며 호객행위와 경쟁업체 간 상호 비방으로 인해 상권 이미지가 하락하기도 했다. 여전히 횟집이 많이 있지만 그 외에도 커피숍, 치킨, 분식집 등 다양한 음식점이 들어서고 있다.

관광유형도 체험형 관광이 주목을 받고 있다. 어촌계에서 운영하는 어촌체험마을사업이나 개인이 운영하는 제부모세농장이 있다. 제부모세농장은 제부도에서 연근을 직접 재배하면서 연꽃 심기, 연 캐기 등의 체험학습과 갯벌 체험을 병행하고 있다. 화성, 수원 인근뿐만 아니라 서울과 강원도에서도 많은 학생들이 다녀갔다.

또 2017년에 개관한 제부도 아트파크도 제부도의 새로운 관광지로 부각되고 있다. 경기만 일대의 자연과 문화, 역사 자원의 보존 및 계승을 통해 지역 공동체를 회복을 목적으로 시작된 이 사업은 전시와 콘서트를 개최하면서 제부도 주민과 제부도를 찾은 관광객들에게 새로운 볼거리를 선사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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